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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시작은 마음의 방향이었다.

by 마음계발


우리는 하루 동안 수없이

많은 선택과 결정을 내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의 바탕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의 힘,

‘의도’가 놓여 있다.


붓다는 말한다.



의도는 곧 업이다.



우리가 짓는 업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마음의 방향’에서 시작된다.

말하기도 전에, 글을 쓰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마음속에서

의도를 내고 있다.


그때 마음은 두 갈래 길 앞에 선다.


유익한가, 해로운가.




그러나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훨씬 더 현실적인

질문이 숨어 있다.



“이 관계가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우리는 이익이 된다고 느끼면

부드러운 의도를 내고, 손해라고 판단되면

마음이 닫히며 해로운 의도가 일어난다.

그래서 의도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이익을 중심에 두는 마음의 작용’이다.



관계는 이미 조건 위에서 시작된다.


사랑, 연애, 결혼, 우정, 직장, 가족...

우리가 맺는 대부분의 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조건 위에서 출발한다.


그 조건은 대부분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이다.


겉으로는 타인을 향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나’라는 축이 존재한다.

그래서 관계에서 우리의 의도는

이렇게 작동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유익한 의도

나에게 손해가 되면 해로운 의도




해로운 의도는 어디에서 오는가?

해로운 의도는 단순히 미움에서

생기지 않는다. 그 더 깊은 곳에

‘나는 손해 보고 있다.’는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일으키는

‘비교하는 마음’이 있다.


붓다는 말한다.


나는 열등하다.
나는 동등하다.
나는 우등하다.

이 세 가지 비교가 괴로움의 시작이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위에 혹은 아래에 세운다.

“나는 저 사람보다

못하다. 비슷하다. 더 낫다.”


이 비교는 나를 ‘손해의 자리’에 세우고

손해라는 감정은 ‘불만족’이 되고,

불만족은 ‘해로운 의도’가 되며,

해로운 의도는

결국 상처를 남기는 행위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상처는 누구의 몫인가?

우리는 타인이 나를

상처 입혔다고 믿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처를 준 사람’은 사라지고

상처를 지닌 ‘나’만 남는다.


따라서 상처는 결국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나의 몫'이 된다.

결국 ‘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한 태도가 필요하다.



“나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왜 상처받는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를 이용하려는 마음도

없었고, 그저 잘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왜 내가 상처를 받아야 해?"



여기서 말하는 ‘의도’는

눈에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아주 미세한 마음의 방향에 가깝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마음 깊은 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들.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실망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

내가 준 만큼 돌아오길 기대했던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마음



이처럼 ‘나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 안에는 이미

기대, 비교, 두려움 같은, 의도 아닌 의도,

작고 미세한 마음의 방향이 스며 있을 수 있다.



‘상처는 나의 책임이다’라는 말이 아니다.

상처는 결국 내 마음에 남기 때문에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돌봐줄 사람 역시

‘나’ 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관계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상대를 바꾸는 힘이 아니라

'내 마음의 방향을 알아차리는 힘'이다.




내가 나를 이해할 때

타인의 행동도 덜 상처가 된다.



결국 관계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의지하는 방식'에서

비로소 균형을 찾는다.


그리고 그 균형은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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