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지훈은 꿈 많은 청년이었다. 처음 사회에 나왔을 땐 그 누구보다 의욕에 차 있었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곧 40이 되는 지금, 아침마다 무겁게 출근길에 오르는 자신을 보며 그때의 열정을 떠올리기조차 어려워졌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피로와 허탈함만이 따라올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최근 저지른 실수는 너무나도 큰 타격이었다.
지훈은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은 실수 하나가 심각한 문제로 커졌고, 결국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팀원과 상사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이제 정말 한계일까?'라는 질문이 끝없이 마음속을 맴돌았다.
회사 내에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갔고, 동료들은 예전처럼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회사는 상황을 해결할 의지가 없었고, 지훈이 자진 퇴사하는 형태로 사태를 마무리할 것을 종용했다.
지훈은 무너진 마음으로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30대를 꼬박 보낸 직장, 수없이 쏟아부었던 노력과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지훈은 더 이상 회사에 매달려 있지 않기로 결심하고 사직서를 냈다.
그는 마지막 퇴근을 하고 나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어깨를 짓누르다 이제야 떨어져 나간 듯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안이 텅 비어버린 공허함도 느꼈다. 이제 자기 안에 어떤 꿈이나 의욕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다행히 통장 잔고엔 다소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 돈 쓸 시간도 없이 열심히 살았던 흔적이었다. 지훈은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멍하니 시간을 보내며 무기력에 빠져 지냈다. 커다란 공허감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던 어느 날, 지훈은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자신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을 보며, 어쩐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과 자신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던 지훈은 한 작은 서점을 지나치게 되었다. 유리창 너머로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이 보였다.
지훈은 문득 한 해안가 마을이 떠올랐다. 아직 푸르던 20대 시절, 바다 내음 가득한 그곳에서 자유와 평화를 만끽했던 기억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녀, 서진도. 지훈은 기억에 이끌려 잠시 그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며칠 후, 바다 마을에 도착한 지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백으로 가득 찬 마을은 조용했고 바다 공기가 짙게 스며들어 있었다. 일그러지고 헝클어져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차츰 밀려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꾸듯 잠자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이어지는 기억만큼 조금씩 오후도 무르익으며 그림자가 길어졌다.
마을을 걷다 보니 책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포근하면서 은은한 불빛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바다의 책장'이라고 적힌 작은 간판이 보였다. 문을 살짝 밀자 작은 종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그리웠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서진이었다.
책방 안에서 책을 정리하던 그녀는 문 쪽으로 고개를 들어 지훈을 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지훈 씨."
지훈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살짝 돌아봤다. 마치 그 길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어느 순간에 도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주변 공기를 잔잔하고 밝게 채우는 그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서진아... 정말 오랜만이야. 여전히 여기 있었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서진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서 얘기 좀 할래?"
지훈은 서진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서진은 차를 내오며 지훈에게 조용히 물었다.
"서울 생활은 어때? 잘 지냈어?"
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모든 게 다 뜻대로 되는 건 아니더라."
서진은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만으로도 그가 지나온 세월의 고단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눈빛은 그녀 자신의 눈빛이기도 했다. 서진은 지훈이 말하려는 것 이상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흐르는 침묵이 어색해져 지훈이 먼저 고요를 깼다.
"책방은 언제부터 한 거야?"
서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한… 10년 정도 됐나? 처음엔 이렇게 오랫동안 책방을 운영하게 될 줄 몰랐어."
"대단하다.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간다는 게."
서진은 조금 쓸쓸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단하긴... 나도 처음엔 많이 불안했어. 내가 정말 여기서 잘할 수 있을지. 마을 책방을 운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그래도 여기에 있을수록 소소한 일상에서 나만의 행복을 찾게 되더라고."
지훈은 서진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마주한 불안감과 혼란스러움을 떠올렸다.
'나도 여기서 지내다 보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다시 무언가를 얻고, 어떤 사람이 될지 알 수 있을까?'
"여긴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야?"
서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지훈은 잠시 망설이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동안 여기 있으려고. 한 달 살기, 뭐 그런 거 있잖아."
서진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또 보겠네. 좋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이랑 얘기도 하고."
책방에서 나오자마자 지훈의 발걸음이바빠졌다. 한동안 이 마을에 머물 준비가 필요했다.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서진과 다시 만난 이 순간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