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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멍구 Feb 03. 2020

현실에 묻힌 꿈을 돌아보고 싶을 때 보는 영화

코엔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

주말엔 소설 쓰는 동생 A를 만났다. A는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카페 구석에 앉아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글 쓰는 그 애를 방해하고 싶지 않단 생각을 하며 안부를 물었다. A는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남편이 출근하면 자신은 카페로 출근해 소설을 쓰고, 남편이 돌아오면 저녁밥을 함께 먹고 또 소설을 고친단다. 소설에 이렇게까지 매진하는 건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졸업을 하고 나면 어디든 받아주는 곳으로 취업을 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저를 받아주는 곳이 있을까요..."


철렁했다. 동생 A 내가 아는 누구보다 반짝이는 원석이었다. 나 또한 취업 준비를 하며  자신의 자질을 계속해서 되물어야 했던 4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A 가진 자질이 얼마나 커다란 강점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부디 자신이 가진 장점을 과소평가해서 형편없는 회사에 적을 두진 않았으면 바랐다.



나는 오래전부터 A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난다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에게 이야기하듯 내가 본 영화의 스토리를 처음부터 조잘대기 시작했다. 소설 쓰는 A는 나의 장황한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었다.





코엔 감독 <카우보이의 노래>

3번째 영화 <meal ticket>



"내가 주말에 어떤 영화를 봤는데..."

나는 토이스토리에 빠져, '카우보이'나 '미국 서부극' 따위 키워드를 넷플릭스에 검색하다 이 영화를 발견했다. A에게 늘어놓았던 영화 이야기는 <카우보이의 노래>에 엮여있던 3번째 영화, meal ticket의 이야기였다.



  영화는 1700년대의 미국 마을길을 지나는 마차를 비추며 시작된다. 마차를 끄는 남자는 마을에 닿자 마차를 멈추고 마차 뒤에 덮인 천막을 연다. 마차 뒤에는 인형극이나 할 수 있을 법한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있다. 공연 시간이 닿으면 관중들은 마차 주변으로 모인다. 이후 극이 시작된다. 커튼이 걷힌 무대 위에는 팔과 다리가 없는 남자 하나가 의자에 앉아있다.


코엔형제 <카우보이의 노래> meal ticket


팔과 다리가 없는 남자는 그 작은 무대에서 1인극을 시작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시나 소설, 성경과 역사 이야기를 읊는다. 남자가 끌어 오르는 에너지로 대사를 뱉을 때마다 관객은 집중하고, 공연이 끝나면 마차를 끌던 남자가 관객들에게 돈을 걷는다.


마차를 끄는 남자와 팔다리가 없는 예술가는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며 공연을 계속한다. 하지만 마차를 끄는 사장에게 팔다리가 없는 남자란, 때마다 밥을 먹여주어야 하고 용변을 볼 때에도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며, 사창가에 가 욕구를 해소할 때에도 지고 가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마을과 마을을 이동할 때마다 젊은 예술가의 공연을 보러 모여드는 관객은 줄어든다. 걷히는 돈도 줄어든다. 마을을 이동할 때마다 예술가의 공연은 보다 격정적으로 변하지만, 마차를 끄는 남자는 근심한다.


마차를 끄는 남자는 어느 마을에서 아주 사람이 많이 모인 마차 공연을 발견한다. 암산하는 닭의 공연이었다. 관객이 17 빼기 3 등의 산수 문제를 내면 닭은 부리를 움직여 산수 문제를 맞혔다. 암산하는 닭을 보는 관객들은 환호한다. 남자는 지폐를 뭉텅이로 꺼내 그 닭을 산다.


이후 이들의 여행은 마차를 끄는 남자, 팔다리가 없는 예술가, 그리고 암산하는 닭이 함께 하게 된다. 팔다리가 없는 예술가는 마차를 끄는 남자를 노려보기도 하지만, 마차를 끄는 남자는 미동 없다.


마차를 끄는 남자는 어느 계속에서 잠시 마차를 멈춘다. 남자는 협곡 아래 커다란 돌을 떨어뜨려본다. 크게 풍덩- 소리가 나도록 깊은 협곡이다. 이후 영화의 장면은 마차를 끌고 가는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비추고, 닭과 예술가가 함께 앉아있던 마차 뒤편엔 이제 닭만 남아 있는 장면을 비추고는 영화는 끝난다.






내가 장황한 이야기를 마쳤을 때, 소설 쓰는 윤아는 이야기의 결말을 두고 눈이 동그래졌다.

"결말을 표현한 방법이 너무 소름 돋아요."

나는 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에 대해, 또 한 번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영화를 다 봤을 땐, 팔다리가 없는 예술가와 닭이 '예술'과 '예술이 아닌 밥벌이'를 은유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또 그 이야기는 나와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더라.

내 안엔 팔다리가 없는 예술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예술가란 돈은 되지 않고 늘 밥은 떠먹여 주어야 하는 성가신 것이라 내가 그걸 버리고 밥을 주는 닭을 선택한 거야."


영화에서 마차 끄는 남자가 닭을 사 올 때, 예술가가 지었던 눈빛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건 경멸과 원망이 모두 담긴 눈빛이었다. 그리고 예술가를 버린 남자의 곤란하고도 슬픈 눈빛은 더욱 오래간 잊히지 않았다.

나도 분명 그 슬픈 눈빛으로 나의 예술가를 버렸을 거란 기분을 느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팔다리 없는 예술가를 버리고 싶지 않아서

너한테 조문을 구하고 싶었어"

나는 긴 영화 이야기의 결론을 꺼냈다.






동생은 나에게 함께 쓰고 합평을 받을 수 있는 모임을 추천해주며 응원해주었다.


"제가 아는 소설가 중에는 언니처럼 직장에 다니면서 조각조각 써서 등단한 사람이 많아요.

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않은 분들도 계시는데, 그런 분들도 정말 잘 써요. 언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나는 합평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한참 찾아보았다.

개강 날짜를 알아두고 그날을 기다렸다.

그러다 또 다른 글쓰기 모임을 찾아 둘 중 하나를 고민하다가,



결국 어떤 것도 가입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조언보단 내가 버린 예술가에게 조의를 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마차 끄는 남자와 예술가의 슬프고 곤란한 느낌은 마음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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