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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아 Jan 26. 2024

척추도 접고 택배 박스도 접고


척추도 접고 택배 박스도 접고



어른들이 죽기 살기로 운동을 하는 이유는 안 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라는 우스갯소리를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20대의 나는 재밌는 어른들이구나 라는 망언을 하며 시건방을 떨었고, 지금은 그 어른 대열의 52만 번째쯤 되는 자리에 힘없이 서있다. 척추에 노화를 직격타로 맞았는데, 사고처럼 갑자기 다가온 고통이라기보다는 등받침 없는 의자에 몇 시간이고 구부정하게 앉아서 그림을 그렸던 입시시절부터 누적된 결과였다.



 더 이상 허리의 통증을 참을 수 없었다. 장기적으로 척추를 보호할 근육을 키우기 위해 운동을 해야만 했고, 나의 상태와 성향에 꼭 맞는 운동을 찾아 나서기 위해 운동복과 든든한 식사로 무장한 가방을 싸들고 모험가마냥 돌아다녔다. 이리저리 기웃대다 4년 전에 만난 기구 필라테스에 마침내 정착해 10여 년의 나름 긴 여정의 배낭을 풀 수 있었다. 




 재활의 목적으로 탄생한 필라테스 기구들을 처음 만난 순간 무자비한 생김새 때문인지 고문 도구가 아닐까 오해를 했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진지하게 이 박력 넘치는 기구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고문 도구가 맞으며, 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선사하는 '현대식 어른용 사랑의 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 큰 어른이 사랑의 매를 왜 맞아야 하는지는 구부정한 자세와 녹슨 소리를 내는 뼈마디가 대신 말해준다.

 미루고 미루다가 위기의식을 느낀 어른들이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정말 죽지 못해 하나 둘 운동을 하기 시작한다. 

흘러가는 시간의 뒤꽁무니도 따라가기도 벅찬 게으른 육체를 단련하고, 학교와 함께 졸업한 근육을 통해 버티는 체험을 모두 할 수 있기에 출퇴근에 쪼그라든 어른들이 스스로 건강한 고문의 장으로 걸어 들어간다.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도 이 고문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돈을 억만금 얹어 준대도 사지 않을 쓸데없는 걱정을 나는 일부러 구매한다. 사실은 전혀 구매할 생각이 없는데도 왜인지 모르게 이미 내 머릿속에 로켓배송으로 도착했고, 개봉을 했다고 반품도 안 되는 이 쓸모없는 걱정 택배들이 쌓이고 쌓여 나를 짓누른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냥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으면 될 정도의 무게인데 왜 그렇게 굳이 끌어안고 고민하는지 나도 내가 답답하다.





 홀로 어깨에 택배들을 이고 일주일에 두 번 필라테스 센터로 향할 때까지만 해도 나의 발걸음은 물먹은 솜마냥 무겁다.

 하지만 수업을 받기 시작하면 정말 신기하게도 머릿속을 꽉 채운 택배의 존재가, 반품이고 나발이고 나는 당장 눈앞에 닥친 육체의 과제를 따라가는 것도 벅찬 상태가 된다.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나의 대퇴근육이 강사님의 자비 없는 숫자 세기를 끝까지 버텨낼 수 있는지, 유약한 광배근은 왜 스프링을 당길 수 없는지 존재하긴 한 건지, 보수를 뒤집어서 그 위에 균형을 잡으려면 왜 분홍신을 신은 것 마냥 털기 춤을 멈출 수가 없는 건지…….





 이 외에도 기상천외한 방법의 고문과 함께 필라테스 기구들은 내 멱살을 잡은 채 이리저리 굴리다가 50분의 시간이 지나면 나를 밖으로 퉤 뱉어놓는다. 그리고 무거운 근육통을 이끌고 한걸음 두 걸음 밖을 나선다. 어느 순간 집으로 가는 길이 더 이상 외롭지 않음을 느낀다. 

무사히 수업을 완수했다는 뿌듯함이 소리 없이 다가와 정신과 육체의 무게를 나누어 들어주기 때문이다. 들고 왔던 걱정들보다 더 무거운 근육통에 납작하게 눌려, 결국 쓸데없는 택배들은 분리수거를 기다리는 모양새가 되어 집에 도착한다.





 이것이 육체 운동의 단순한 수행이 주는 확실한 보상이구나! 일상은 문제들을 일부러 꼬으는 복잡한 방정식을 강요하지만, 육체 운동은 문제가 적힌 종이를 단순하고 투박하게 척척 접어버리는 선택지를 준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 맞이하는 간결한 해방감과 지혜로운 이치를 깨닫는 이 경험을 나는 너무나 사랑한다. 육체의 문제로 시작했던 운동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관성적인 정신의 무거움도 함께 날려버릴 수 있다.





 쓸데없는 고민택배는 여전히 성황리에 배송 중이며 반송할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건강하게 분리수거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과정이 꽤나 괜찮은 루틴이라 생각한다. 아마 관절이 허락하는 한 이 고문을 기꺼이 즐길 예정이다. 오늘도 나는 척추도 접고 택배박스도 접으러 가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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