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나는 죄인이었다.
1997년 4월 3일, 10시간의 진통 끝에 태어난 나는 모두의 축복 속에서 탄생했다. 그 해에만 한국에서 67만여명이 태어났고 나의 탄생이 뭐가 그렇게 특별하겠냐마는 가족들에게 나의 존재는 소중했나보다. 나의 아버지는 1남 6녀 중 여섯째로 할머니는 아들을 낳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셨다고 한다. 특히 대를 이어가는게 소중했던 그 시절에는 장손이 태어나는 게 큰 기쁨이었겠지?
우리 할머니는 무당이셨다. 항상 집안에는 법당이 방 한켠에 있었고 굿으로 돈을 버셨다고 한다.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은 천주교 신자다. 어머니 집안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는데 우리집 문 앞에는 부적이 붙어져있고 방에는 성모마리아와 예수님이 계시니 참으로 독특한 풍경이다.
할아버지는 알콜중독이셨다. 아빠가 어릴때는 매일 술만 먹으면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고 한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항상 불안에 떨며 살았고 할머니는 그 상황을 피하고자 자식을 두고 도망다니기도 했단다. 할머니가 보고싶었던 초등학생 아빠는 할머니를 찾아 나섰는데, 보자마자 매몰차게 돌아서던 할머니를 보고 큰 충격에 빠졌었다. 아빠와 고모들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린시절 받았던 상처들에 눈물을 흘리고 하소연을 하곤 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맞으며 이웃들과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가정일이기에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아빠는 그래서 여전히 마음을 닫고 산다.
여튼 나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태어나졌다. 눈 떠보니 고모가 6명이었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새로운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대통령님이라고 부르신다. 나중에 꼭 큰일을 낼 사람이 되길 바라셨나보다. 어릴때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 내가 성공해야 집안을 먹여살리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였다. 사촌들, 여동생과 나를 구분해서 차별하였고 고기반찬은 매일 내 차지였을 정도로 어찌보면 잘못된 사랑을 받아왔다.
매해 명절이면 우리집에 온 집안 식구들이 모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과 팔촌까지,, 나는 할머니가 참관하는동안 아빠와 함께 제사를 지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선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할아버지 제사를 같이 지내게 되었다. 혼자 제사를 지내는동안 받는 여동생과 사촌들의 관심이 굉장히 따갑게 느껴졌다. 사실 나에게 시샘을 하거나 그런건 아니었지만 나만의 착각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제사를 지내는 방식에 대해 꾸짖기도 하시고 여동생이나 다른 사촌들이 제사를 못하도록 막기도 했다.
제사가 끝나고, 나는 할머니에게 세배를 드렸고 할머니는 나에게 우리 대통령님 나중에 성공해서 큰 어른이 되라고 덕담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하루는 나를 따로 불러, 지금 여기 우리집에 오는 사촌이나 친척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내가 잘되고 성공해야 찾아올테니 무조건 사촌들보다 잘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때 나는 큰 혼돈에 빠졌다. ‘내가 이 가족에서 크게 해야 할 역할이 있는건가?’ 그 후로
나는 여동생이나 가족, 사촌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보는 눈들이 경멸과 질투심으로 바뀌는것만 같았고 굉장히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라는 공포에 빠져 일부러 피하기도 했던거 같다. 나 같아도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내가 미웠을 거 같았다.
어렸을적의 나는, 순하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고 한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기에 할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동생과 함께였기에 나만 챙겨주는 날들도 점점 많아졌다. 할아버지는 가끔 술 먹고 집에서 행패를 부리시곤 했다. 욕을 하며 싸운다거나,, 하지만 나를 굉장히 예뻐하셨다. 유치원 끝나면 항상 데리러 오시고 업고 다니시기도 했다. 그러나 집에선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도 하고 엄마는 나를 데리고 싸우는걸 못보게 숨어있기도 했다고 한다.
6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동생이 태어난 후 나는 고모 집 근처로 이사를 갔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10살, 어느날 학교 끝나고 집에 왔는데 할머니가 나를 붙잡고 펑펑 우셨다. 아무래도 갈등이 있었나보다. 그 일을 겪고, 나는 이 집안을 일으켜야 되고 해결해야되며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 자책하기도 했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아빠의 뒷모습과 이모를 잃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에 죄책감을 가졌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선생님에게 맞고 와도 나는 말하지 못했다. 말 할수 없었다. 힐들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고, 할머니와 우리집은 독립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해 자퇴를 하였고, 무당이신 할머니는 내게 마귀가 들었다고 굿을 받으며 예수상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명절에 누군가가 오는게 괴롭고 힘들었다. 성공해야하는데, 내가 바라던 모습은 이런게 아닌데,,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를 비웃고 내구역을 침범하는것처럼 느껴지면서 그걸 견디지 못했던거 같다. 명절의 나는 죄인이었다. 누구에게도 떳떳할수 없는 창피한 인간이라고 느꼈고, 실패만을 거듭하며 수치심과 모멸감만 늘어갔다.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지금은 아무도 집에 오지 않는다. 이번 설에도 나 혼자 제사를 지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혼자 가장의 무게를 짊어진 아빠와 며느리로 모두를 챙겨야했던 엄마, 그냥 시대에 맞물려 살아간 할머니의 입장을 모두 이해한다. 지금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내려놓으니 오히려 친척들과도 더욱 편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은 계속 갖고 가야만 할거 같다.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남들이 말하는 성공이나 부, 권력이 아니라 나의 행복이고, 이를 통해서 주변사람들에게 보답하고 나누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이러한 것들이 불편하지가 않다. 사랑을 나눌수 있다면, 그것만큼 소중하고 대단한 일이 있을까? 아무튼 이번 명절은 이렇게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끝이 났다. 다가올 앞으로의 삶도 즐거울거라 생각하며,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산다면 온전히 자유로운 내가 될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