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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흑 Jan 30. 2024

영화 ‘떼시스’, 공포 영화 소비의 윤리를 묻다

 영화의 여러 장르 중 하나인 ‘공포호러 어떤 관객을 반색하게 만들며 어떤 관객은 질색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공포나 호러(그리고 스릴러) 장르의 정의와 나름의 구별 기준은 존재하나 사실 그 기준은 명확하다고 보기 어려울 때가 많으며, 한 영화 내에서도 이러한 장르가 단일하게 존재하기보다는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명확히 하자면 장르를 구분해야겠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공포감이나 긴장감을 주는 영화를 ‘공포 영화’로 통칭하겠다.


 (나의) 재미있는 공포 영화에 대한 집착은 상당히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미취학 아동 시절 엄마가 틀어둔 <전설의 고향>을 자는 척하며 몰래 보던 순간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집착이다. 지금 보면 참 조악한 수준의 CG이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무서운 이야기이자 영상물이었다.


 그런데 공포 영화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열의가 높은 것과 별개로 누군가에게 공포 영화가 왜 좋냐는 물음을 받으면 답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어떤 영화가 그저 영화라는 이름 아래 존재할 수만 없으며, 어떤 장르가 그저 영화의 한 장르로 존재하기에는 현실과 맞닿은 지점이 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공포 영화는 나는 과연 공포 영화의 어떠한 지점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공포 ‘영화’를 소비한다는 안전지대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영화 <떼시스>는 이 의문을 정렬하고 있다. ‘영화에 나타난 폭력’을 주제로 논문을 작성하는 ‘앙헬라’는 지도 교수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교수가 보던 비디오테이프를 가져간다. 앙헬라는 ‘체마’와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테이프에 등장하는 여성이 같은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앙헬라는 그 여학생의 친구 ‘보스코’를 만나며 의심의 늪에 빠진다. 


 다소 늘어지는 후반부 전개는 아쉬웠지만 <떼시스>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을 수 없었으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직전까지 좋았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앙헬라와 체마가  비디오테이프는 ‘스너프 필름(snuff flim)’이지만, <떼시스>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미디어를 관음하려는 인간 본성 대한 이야기며 이 폭력적인 미디어에는 많은 것포함된다는 을 유념해야 한다. 무엇보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스너프 필름이 아니라 공포 ‘영화’라는 주장으로 자기 위안을 삼기에는 찜찜함이 남는다. 스너프 필름은 ‘실제 상황’이고, 영화는 ‘연출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우리가 연출된 상황을 보며 ‘더 리얼한 연기’를 원하는 것을 알아차릴 때, 영화를 소비한다는 안전지대는 점점 희미해진다.



현실을 재현하지만 현실은 아닌 것

 공포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되는 것은 살인(마)(<싸이코>, <오디션>), 악마(<오멘>, <오큘러스>), 좀비(<월드워Z>), 트라우마(<이도공간>, <스마일>),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어떠한 상황(<유전>, <곡성>) 등이다.  이러한 영화에는 대체적으로 고통에 빠지는 주인공이 등장하며(<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어떤 방식으로든 인물의 고통이 대체로 해소되거나(<피기>, <악마의 등뼈>) 가족의 사랑을 깨달으며 행복한 결말을 맞기도 하지만(<컨저링> 시리즈) 죽거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거나(<궁녀>, <장화, 홍련>) 본인이 악에 ‘전염’되어 버리는(<혈의 누>, <큐어>) 경우도 있다.


 현실에서 연쇄살인마를 마주치거나(<추격자>), 거울 속 또 다른 나를 발견하거나(<룩 어웨이>), 함께 있던 사람이 살해당한다면(<베니스 유령 살인 사건>) 어떨까.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에서 발생한다면 끔찍할 만한 일을 다루는 영화를 찾아보며 왜 궁금해해는 것일까. 만일 내가 저 황에 놓인 인물이라면’ 같은 상상이 그저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이유는 영화를 끄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오늘 영화 재미있게 잘 봤다’라고 생각하면서 대부분의 감정을 휘발시킬 수 있는 것은 볼 때는 무서워도 막상 그것이 나의 일은 아니라는 의식 덕이.


 영화와 현실을 분리하는 것은 탈출구를 마련해 놓는 것과도 같다. 공포 영화를 소비할 때 우리의 의식은 ‘현실 사건을 소비할 수는 없다. 영화는 그래도 된다. 현실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흐름으로 나아간다. 공포 영화 소비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더 먼저 논의되었어야 하는 것은 아마 이것 같다. 과연 영화와 현실은 분리될 수 있을까?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는 영화로 보자’라는 말은 과연 성립 가능할까? 


 영화를 보는 우리의 반응은 현실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정말 연기가 맞는가 하는 의문이 스쳐 지나갈 때, 진짜 반응과 리얼한 연기를 구분하려고 할 때, 공포 영화는 현실의 영역으로 성큼 다가선다.



끔찍하다고 말하는 입과 결코 피하지 않는 눈

 스너프 필름을 처음 접하는 앙헬라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다가 손가락을 벌려 눈을 내놓는 모습은 영화 포스터 이미지로 쓰일 만큼 상징적이다. ‘끔찍해서 못 보겠다’는 입과 다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보려는’ 의지를 발견할 때, 몸서리를 치면서도 실은 이것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지면서 관객은 섬뜩함을 느낀다.


 <떼시스>는 해답을 제시하는 영화는 아니다.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에게 ‘당신은?’이라고 물을 뿐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화면 앞에 앉아 영화를 보며 긴장하는 우리에게 아주 매서운 질문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떼시스>는 공포 영화다. 그리고 그렇기에 <떼시스>가 던지는 질문은 영화가 끝날 때 다시 영화의 시작으로 되돌아온다. 처음부터 다시 재생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지금까지, 무엇을 즐겼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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