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쌍기> 시리즈
유진위 감독의 영화 <서유쌍기(1994)>는 ‘월광보합’과 ‘선리기연’ 2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코믹한 장면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눈물을 쏙 빼놓는 진지한 전개를 보여 주기 때문에, 1편과 2편의 이야기는 이어지지만 분위기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느낌마저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반전 매력 때문에 주성치 영화 중 <서유쌍기>를 명작으로 뽑는 사람이 많다.
다만 1편과 2편을 나누어 개봉한 것이 관객들에게 낯설었던 탓인지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다. 당연히 인기를 끌고 흥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화가 흥행하지 못하자 주성치는 상당히 당황했지만, <서유쌍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인기를 끌었다. 주성치는 감독이 되어서도 <서유항마편(2013)>이라는, <서유쌍기>에 대한 답장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서유항마편> 인터뷰에서 주성치는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 “자신감이 회복되었다”라고 말하며 기뻐하기도 했다.
중요한 부위에 불이 붙어 버려 불을 끄기 위해 단체로 그곳을 밟는 장면, 당삼장 버전의 ‘Only You’, 이형환영대법으로 자하와 저팔계의 몸이 바뀌어 버리는 웃기지만 웃지 못할 상황 등 <서유쌍기>는 코믹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몹시 진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비극적 서사, 자비를 깨닫거나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정신을 보여 주는 장면 등 ‘서유기’의 팬이라면 끄덕이게 될 불교의 가르침도 담겨 있다.
손오공은 당삼장을 잡아먹으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말에 우마왕과 결탁해 당삼장을 잡아먹으려 한다. 파렴치한 행동을 하고도 반성하지 않는 손오공에게 분노한 관세음이 그를 소멸시키려 하자 당삼장은 자신을 바칠 테니 손오공을 환생시켜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손오공의 환생 지존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존보는 도적 두목으로 생활하다 우연히 요괴 백정정과 춘삼십낭을 만나게 된다. 백정정은 지존보를 보고 어릴 적 자신에게 결혼하자고 해 놓고 이제는 나 몰라라 하는 손오공이라며 분노하지만 지존보는 전생을 알 턱이 없다. 지존보는 백정정과 사랑싸움을 반복하다 결국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기쁜 순간은 몹시 금방 지나가 버린다. 춘삼십낭과 지존보 사이를 오해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백정정을 구하기 위해 지존보는 월광보합이라는 타임머신을 사용하지만, 매번 한발 늦어 백정정이 죽는 모습만 반복하게 된다. 월광보합을 연이어 사용하다가 500년 전으로 이동하게 된 지존보는 백정정의 사부 자하를 만난다. 자하는 지존보가 자청보검을 단번에 뽑는 걸 보고 그가 자신의 낭군이라고 생각하지만, 백정정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지존보는 자하를 밀어낸다. 자하가 직접 지존보의 심장(마음)에 들어가 보았을 때 수긍하고 떠난 걸 보면 이때는 정말로 백정정이 마음에 있던 때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지존보는 우연히 ‘월광보합’의 첫 장면이었던 뻔뻔한 손오공과 분노한 관세음을 목격한다. 지존보는 몰래 월광보합을 챙기려다가 머리를 맞고 기절하고, 당삼장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다 둘은 우마왕한테 잡히고, 지존보는 우마왕의 처가 될 자하와 다시 재회한다.
지존보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자하는 지존보에게 칼을 겨눈다. 지존보가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은 본격적인 <중경삼림(1994)> 패러디다. “그때 칼과 목 사이는 0.01cm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검의 주인이 나를 사랑하게 된다”라며 왕가위 영화 특유의 내레이션 형태를 빌려오면서도, 몰래 가운뎃손가락을 펴 보이는 재간은 잊지 않는다. 자하는 지존보의 거짓말에 감동을 받고 자신이 월광보합을 챙겨 올 테니 만나자고 한다. 그러나 일이 꼬여 버리면서 지존보와 자하는 떨어지게 되고, 우마왕과 꼼짝없이 혼인할 위기에 놓인 자하는 지존보만을 기다린다.
한편 지존보는 도적에게 간호받다 과거의 백정정을 만나게 된다. 지존보가 백정정에게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지존보와 백정정은 혼인을 준비한다. 그러나 지존보의 마음을 들여다보고는 자하에게 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정정은 지존보의 곁을 떠난다. 지존보는 춘삼십낭에게 자기 심장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면서 자신을 베어 달라고 부탁한다.
지존보의 심장 안에는 자하의 눈물이 있었다. 그동안 지존보에게는 백정정의 이름보다 자하의 이름을 더 많이 불렀다는 사실을 타인을 통해 전해 듣는 등 자신의 마음을 짐작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자하에 대한 마음을 확실히 깨달은 것은 자신의 심장을 확인한 뒤였다. 지존보는 죽어서야 자신의 마음에 남은 자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은 지존보는 마침내 긴고아를 쓰고 손오공으로 거듭난다.
이 영화 속 주성치는 “과거에 사랑을 앞에 두고 아끼지 못하고 잃고 난 후에 큰 후회를 했소.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이오. 하늘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겠소.”라는 대사를 두 번 한다. 한 번은 자하 앞에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할 때, 한 번은 긴고아를 쓰기 전이다. 같은 대사를 아주 다른 상황에서, 거짓된 태도가 아닌 진실된 태도로 읊을 때 이 대사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주성치 영화에서 기대를 뒤틀어 버리는 전개, 희극과 비극을 구분하기 어려운 희비극 장르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서유쌍기>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하와 당삼장 등을 구하기 위해 구름을 타고 날아온 손오공은 자하를 차갑게 대하며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우마왕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하늘로 날아가는 자하는 영화 속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던 낭군 이야기를 한다. 자하가 “낭군이 구름 타고 올 것이라는 말의 반은 맞혔지만 나머지 반은 맞히지 못했다(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자신을 구하러 오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쌀쌀맞게 구는 손오공이 낭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라고 읊조리자, 마음이 아파진 손오공은 자하의 손을 붙잡는다. 하지만 자하의 손을 붙잡을수록 긴고아는 손오공의 머리를 옥죈다. 고통을 참던 손오공은 결국 자하의 손을 놓아 버린다. 자하가 죽고 분노한 손오공은 지력을 다해 우마왕을 처리한다. 그리고 다시 500년이 지난다. 폭풍 같던 시절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손오공은 반사동에서 나와 삼장법사 등과 마주한다.
손오공은 서역을 향하다가 우연히 자신과 자하를 똑 닮은 남녀를 보게 된다. 남자가 여자를 자꾸만 밀어내는 모습은, 지존보가 500년 전 자하의 입맞춤을 거절하던 상황을 떠올리게 만든다. 손오공은 잠시 남자의 육신에 들어가 여성을 안고 다시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다. 남자는 당황하지만 이내 상황을 받아들인다. 지존보는 500년이 지나고 나서야 자하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었다. 이로써 자하와의 연을 청산한 손오공은 홀가분한 표정을 짓지만 관객은 어딘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는 엔딩 위로 <서유쌍기>의 주제곡 ‘일생소애’가 흐른다.
<서유쌍기>는 유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가슴 아픈 멜로를 보여 주면서 희비극이라는 장르를 구현한다. 영화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지만 속세의 정을 끊어내야 하는 운명에 놓인 손오공을 보여 주면서 관객들도 함께 그의 번뇌를 느끼게 만든다. 영화 내내 관객을 웃음 짓게 만들던 인물이 웃음기를 쏙 뺀 진지한 태도를 보일 때, 관객들은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 태도에 자연히 빠져들게 된다. 지존보이자 손오공이라는 인물이 겪는 내적 갈등이 더욱 깊게 와닿을 수 있는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의 대사를 패러디해 자유자재로 사용한 것도 <서유쌍기>의 매력이다. <중경삼림> 속 금성무가 진지한 태도로 내레이션 하던 유명한 대사를 너무나도 다른 두 상황에서 웃기게도, 슬프게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이 돋보인다. 융복합이라는 개념과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영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