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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휩쓴 그 대사

<당백호점추향>

by 일영
©영화 <당백호점추향>

“다시 보니 선녀 같다.” 인터넷을 휩쓸었던 밈(meme)을 기억하는가? 처음에는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것과 비교해 보니 괜찮아 보인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밈은 영화 <당백호점추향(1993)>에서 주성치가 길을 가던 공리를 보며 하는 대사다. 본래 대사는 “이렇게 보니 예쁘네”라는 의미이니 밈으로까지 쓰일 정도의 대사는 아니었지만, 인터넷을 휩쓸고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었던 것은 번역 덕분이다. 영화가 파편화된 밈으로 <당백호점추향>을 접한 사람들은 대사의 주인공이 주성치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신기해하기도 한다.


<당백호점추향>은 이력지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중국 명나라 강남사대재자(江南四大才子) 중 하나였던 당인(唐寅)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백호라는 자를 붙여 당백호라는 이름으로도 더 잘 알려져 있는 당인은, 그의 작품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수어 편 만들어지고 인기를 얻을 정도로 ‘서사적인’ 측면에서도 매력적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과거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하옥된 이후, 더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다는 점이 비범한 인물이 겪는 고난을 부각하는 탓인지는 몰라도 당백호는 그동안 창작물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당백호는 그림과 시를 팔며 살았다. <당백호점추향>에서도 당백호의 그림을 사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이나 당백호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당백호점추향>은 제목 그대로 당백호가 추향을 점(點)했다는 이야기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 속 당백호는 추향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온갖 애를 쓴다. 사실 추향이라는 여성도 기록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영화처럼 화(華) 씨 집안의 몸종이 아니라 유명한 기생이었던 추향 역시 그림을 비롯하여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추향과 당백호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그들이 실제로 사랑에 빠졌을 확률은 매우 낮다고 한다. 어쩌면 동시대 능력 있고 인기 있었던 사람들끼리 엮어 보고 싶어 하는 심리가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당백호점추향>

명성과 실력, 재력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주성치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다. 8명의 아름다운 아내들을 두었지만 많은 아내 중 주성치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이는 없다. 게다가 아내들이 다 도박 중독이다. 주성치가 그린 그림을 잘라서 마작패에 붙이거나, 책상 높이를 맞추기 위해 주성치의 시집을 책상다리에 끼우기도 한다. 허구한 날 의자에 토하거나 술잔을 깨뜨리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주성치가 새로운 여인을 찾아 나서는 서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과장된 묘사다. 달밤에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슬퍼하는 주성치의 모습을 보자면 다소 어이가 없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영화의 전개가 전개이니 어쩔 수 없다.


어느 날, 주성치는 길을 나섰다 공리의 아름다운 외모와 인성에 반하게 된다. 찜한 여자는 절대로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쟁취하는 주성치가 등장하는 초기 주성치 영화처럼, <당백호점추향> 속 주성치도 공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쓴다. 공리가 일하는 화 씨 집안의 시종으로 들어가는 것부터 고난이다. 주성치는 경쟁자와 자해 대결을 펼치거나 죽은 바퀴벌레 더듬이를 붙잡고 눈물 연기를 한다.


몸종으로 들어가서도 수난은 계속된다. 몸종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거나 공리에게 추근대다 거대 방망이로 얻어맞아 기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초기 영화들 속 주성치가 여성을 쟁취하는 데 실패한 적이 드물었던 것처럼, <당백호점추향>의 주성치도 끝내 공리의 마음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영화 <당백호점추향>

<당백호점추향>은 주성치 영화 중에서도 유독 막 나가는 영화다. 여러모로 관객의 기대감을 깨뜨리다 못해 관객의 상상 이상을 보여 준다. 붓을 들고 무언가를 비장하게 그리거나 쓸 것 같다는 기대감을 부여해 놓고 바로 닭날개 소스를 바르는 주성치 모습을 풀샷으로 잡아 주는 첫 장면에서부터, 그 어떤 것도 관객 뜻대로 두지 않겠다는 연출자의 의지가 보인다.


맥박으로 EDM을 연주하는 장면, 뮤지컬처럼 노래를 주고받는 장면, 드럼을 치며 변명하는 주성치의 매력에 빠진 여성들의 머리가 솟아 버리거나 환상 속에서 날아다니는 장면은 예사다. <당백호점추향>은 여기서 한술 더 뜬다. 붓 하나로 사람 몸을 마구 휘두르며 그림을 그리는 장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 때문에 문 뒤에 있던 사람의 배에 칼이 꽂히는 장면, 얼굴이 부어 오른 인물에게 마구 주먹질을 해서 얼굴을 돌려놓는 장면, 주성치와 정패패가 자신의 독약이 얼마나 강력한지 설명하다 홈쇼핑 광고로 전환되는 장면 등 다른 주성치 영화에서는 잘 찾아보기 어려웠던 연출이나 설정을 다수 사용했다.


©영화 <당백호점추향>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이 영화는 공리를 제외한 모두와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 그래서 오히려 망가지지 않은 공리가 머쓱해지는 꼴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게 괴상해서 괴상하지 않은 사람이 괴상해 보이는 꼴이라니 참 이상하다. 사실 <당백호점추향> 촬영 당시 주성치와 공리의 불화설은 유명한 이야기다. ‘망가지는’ 코미디에 대한 불신이 있었던 공리와 주성치 사이 갈등은 작품 이후 주성치나 공리의 인터뷰를 찾아보았을 때 기정사실인 듯하다. 공리는 <당백호점추향>에서 본인이 더 망가졌다면 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당백호점추향>은 코미디와 무협, 로맨스가 뒤섞인 영화다. 주성치가 공리를 아내 삼기 위해 겪는 스토리를 줄기로 하여 정패패와 주성치의 대결, 정패패와 주성치, 유가휘의 화려한 무협 액션 등 볼거리가 화려하다.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지만, 현대 관객의 입장에서 불쾌할 만한 부분도 눈에 띈다. 영화 전반적으로 인물의 외모에 대한 언급과 희화화가 두드러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사 “다시 보니 선녀 같다” 역시 타인의 외모에 관한 대사다. 여성의 외모를 부각하기 위해 최대한 못생기게 분장한 남성들을 주위에 배치한 것도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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