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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가의 극중극

<007 북경특급 2>

by 일영

<007 북경특급 2(1996)>는 주성치가 괴짜 007로 나왔던 <007 북경특급(1994)>의 후속작이지만, 실은 전작과 큰 관련은 없는 영화다. 전작처럼 변주된 007 음악을 영화에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연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007 북경특급 2>는 주성치가 황제의 호위무사라는 전제부터 새로운 영화다.


©네이버 영화

호위무사 ‘공희발재’ 중 00발 역할인 주성치는 네 호위무사 중 가장 이상하다. 엄청난 무술 실력을 자랑하는 다른 호위무사에 비하면 주성치의 무술 실력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주성치의 장기는 발명이다. 매번 자석이나 선풍기처럼 신기한 발명품을 내놓지만 이 발명품들은 오히려 황제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최후의 수단으로 주성치는 궁궐에 침입한 협객들로부터 천외비설을 얻었다고 말하지만, 정작 천외비설을 쓸 줄 몰라 황제의 미움을 사고 궁에서 내쫓긴다.


궁에서 쫓겨난 00발은 집으로 돌아와 산부인과 의사로 일한다. 00발에게는 토끼 같은 아내 유가령이 있다. 이 영화 속 주성치와 유가령은 몹시 닭살 돋는 부부다. 주성치는 칼을 쓰다 다치지 않도록 하는 보조 손 발명품이나 청소하는 게 힘들 때 쓸 수 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 신발을 만들어 유가령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부인과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던 중, 자신에게 할당된 비밀 임무가 있다는 소리에 궁에 들어간 주성치는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이것이 비밀 임무였다)를 처리하며 황제가 금나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나름 충성심이 있는 주성치는 황제가 금나라로 가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면서 그를 지키기 위해 유가령과 함께 금나라로 떠난다. 금나라에서 황제를 시해하려는 인물들을 자석과 선풍기, 다이너마이트 같은 발명품으로 처리한 00발은 그 공을 인정받아 다시 궁으로 복귀하고, 정말로 비밀 임무를 맡게 된다.


©네이버 영화

비밀 임무는 바로 기방에서 소문난 금나라 여인 금초를 황제 앞으로 데려오는 것. 주성치가 소문난 애처가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여인인 금초를 가로채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주성치를 임무 수행자로 지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여장을 하고 금초가 속한 기방에 간 주성치는 남장을 한 금조를 만나게 된다. 금초와의 짧은 눈 맞춤에 주성치는 금조와 춤을 추는 상상을 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군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느낌은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된다. 정신없는 표정과 말투로 유가령을 대하는 모습에서 금초가 보통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황제나 기방 주인이 금초를 묘사한 것에서 관객들은 아름다운 여인으로서의 금초의 모습을 기대한다. 하지만 금초는 남장한 모습으로 관객 앞에 등장하면서 이 기대를 비틀어 놓는다. 금초를 황제에게 데려가야 하는 임무 수행자 주성치가 적극적으로 작전을 펼칠 것이라는 기대 역시, 눈빛 하나만으로 주성치가 금초에게 제압당하는 상황을 통해 깨지고 만다. 주성치의 상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춤을 추자고 제안하는 금초와 수동적으로 금조를 따르는 주성치의 모습에서 관객 역시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제부터는 ‘과연 주성치가 금초에게 넘어갈 것인가?’가 영화의 화두로 떠오른다.


©네이버 영화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 할 임무 수행자가 어떠한 이유로든 흔들리는 전개는 익숙하다. 하지만 <007 북경특급 2>는 조금 다르다. 이 기대를 극중극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비틀어 버리기 때문이다. 극중극이란 연극 속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으로, 극 안에서 약속된 역할놀이다. 극의 인물들을 위한 극으로서 극 인물들이 관객이 된다. 극중극은 극의 재미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은 곧 극장이며 인간은 모두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부각한다. 이제 관객마저 깜빡 속여 버리는 극중극이 시작된다. <007 북경특급 2>의 극중극은 이렇다. ‘주성치는 유가령을 배신하고 금초와 사랑에 빠진다. 상처 입은 유가령은 눈물을 흘린다.


보통 극중극에 참여하는 인물들은 모두 배우이면서 작품을 즐기는 관객이 되지만, 이것이 극중극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배우도 있다. 바로 금초다. 극중극 속 인물들은 금초가 황제를 시해하려는 목적을 가진 금나라의 금무왕상이 여인으로 둔갑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처리할 계획의 일부로서 극중극에 참여한 것이다. 금초에게 완전히 넘어간 것 같았던 주성치가 이것이 모두 극중극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영화의 전개는 다시 반전된다.


©영화 <007 북경특급 2>

극중극이 막을 내리면 시상식이 펼쳐진다. 주성치에게 돌아갈 것 같던 남우주연상이 주성치의 장인에게 돌아가는 것 역시 이 영화의 소소한 재미 요소다. 코미디 연기로 상을 받기가 몹시 어렵다는 딜레마를 피하지 못했던 주성치 역시 작품의 흥행과 연기 실력에 비해 상을 잘 받지 못한 배우 중 하나다. <007 북경특급 2>의 주성치는 시상식에서 이에 대한 마음을 내보인다. 영화 속 인물들은 주성치에게 연기에 소질이 없다는 독설을 날린다. 주성치의 이러한 자조적인 개그는 실제 현실과 연결되는 또 다른 재미다.


<007 북경특급 2>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관객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영화다. 그러나 이 발칙함은 사랑스럽다. 주성치와 유가령의 매력도 한몫한다. 유가령과 주성치라는 독특한 조합이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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