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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덕후 주성치

<쿵푸 허슬>

by 일영

유난히 내성적인 아이가 있었다. 하루 종일 창문 앞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을 가만히 구경하던 말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어느 날, 아이는 영화관에서 <맹룡과강(1972)>을 보게 된다. 쿵푸로 마피아를 쓸어 버리는 이소룡의 모습에 매료된 아이는 액션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 아이가 바로 주성치다.


어린 주성치를 단번에 매료시킨 이소룡은 어릴 때 무술에 입문하여 태극권이나 영춘권 같은 무술을 배우고 절권도라는 무술(철학)을 창시한 무술가이자, 배우이며, 20세기를 제패한 시대의 아이콘이다. 무술을 대중화하고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영화인으로서도 유명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영화 속에서 노란 체육복을 입고 기합 소리를 내는 모습은 여전히 이소룡의 시그니처다.


주성치가 이소룡을 보며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일화는 워낙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주성치의 이소룡 사랑이나 무협에 대한 관심도 유명하다. <정무문(1972)>의 스토리라인을 들고 와 ‘주성치 식’으로 해석한 <신정무문(1991)>에서 주성치는 이소룡의 도장 깨기 액션을 패러디한다. 쿵푸와 축구를 결합하는 시도를 한 <소림축구(2001)>에서 주성치는 군무 장면의 안무 지도를 위한 안무가 진국곤을 보고 이소룡을 닮았다며 배역을 맡긴다.


©영화 <쿵푸 허슬>

주성치는 영화 자체에 이소룡과 무협에 대한 사랑을 녹여내기도 한다. 배우이자 감독으로서 주성치의 대표작이 된 <쿵푸 허슬(2004)> 이소룡과 홍콩 무협 영화에 대한 오마주와 재현으로 가득 차 있다.


1940년 중국 상하이, 무시무시한 도끼파의 일원이 되고 싶지만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주성치가 돼지촌(저롱성채)을 찾아가 돈을 뜯으려 한다. 그런데 만만하게 생각했던 이 돼지촌 주민들이 조금 이상하다. 왜소하고 보이던 사람들마저도 모두 근육질이다. 호기롭게 도끼파를 사칭하며 협박하다 점점 기세에 밀리기 시작한 주성치는 돼지촌 주인 원추에게 슬리퍼로 두들겨 맞으며 쫓겨난다. 평범해 보이는 돼지촌 주민들이 알고 보니 무림 고수라는 설정은 <쿵푸 허슬>의 서사를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쿵푸 허슬>은 돼지촌을 배경으로 쿵푸와 무협 고수들의 대결을 다룬다.


©영화 <쿵푸 허슬>

<쿵푸 허슬>은 주성치 영화답게 코믹한 에너지와 각종 영화들의 패러디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영화지만, 기본적으로 정통 무협 영화다. 주성치는 중국 무협 소설의 대가인 김용의 세계관이나 홍콩의 여러 무협 영화를 고스란히 녹여낸다. 야밤에 고쟁을 활용한 음공을 보여 준다거나 여래신장을 사용하는 모습 등은 이미 여러 무협물에 자주 등장했던 내용이다. 기존 텍스트들에서 사용되었던 무공을 자신의 영화에서 재현하는 모습에서, 주성치가 무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쿵푸 허슬>은 1970~80년대 유행했던 홍콩 무협 영화를 스크린으로 소환해 낸다.


어릴 적 여래신장 입문서를 읽으며 수련하던 주성치는 동네 남자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여자 아이를 구해 주려다 호되게 당하고 만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결국 험한 꼴을 당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후 주성치는 건달이 되기로 결심한다. 주성치는 도끼파를 동경하며 늘 무시무시한 건달이 되기를 꿈꾸지만 실제로는 허름한 삼류 건달일 뿐이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도끼파의 일원이 되어 임무 수행의 기회를 얻는다.


©영화 <쿵푸 허슬>

그러나 어릴 적 자신이 구해 주려고 했던 소녀와 우연히 재회해, 자신의 ‘착했던’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된 주성치는 결국 도끼파를 배신하고 돼지촌 사람들의 편에 선다. 자신 안에 늘 존재하고 있었던 선한 마음을 깨달은 것이다. 동시에 주성치는 자신에게 내재된 능력을 깨닫게 된다. 임독이맥이 뚫리기만 하면 무림고수로 거듭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무공을 자유자재로 수행하게 된 주성치는 도끼파가 돼지촌을 공격하기 위해 데려온 고수 화운사신을 굴복시킨다. 화운사신이 주성치에게 (주성치가 행하는 무술이) 어떤 무술이냐 묻자, 주성치는 알고 싶다면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다. 주성치의 자비로운 얼굴 뒤로 눈부신 빛이 떠오른다.


착한 심성을 가졌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 심성과 자신의 무공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쿵푸 허슬>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소룡을 불러낸다. 주성치는 이소룡 같은 복근을 만들고 이소룡의 절권도를 한다. <쿵푸 허슬>은 비록 주성치 자신은 이소룡이 될 수는 없지만, 영화 속에서라도 이소룡 같은 캐릭터가 되어 보자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처럼 느껴진다.


©영화 <맹룡과강>
©영화 <쿵푸 허슬>

<맹룡과강>에서 이소룡이 마피아 보스에게 하던 손동작을 <쿵푸 허슬>의 원추가 재현하면서 도끼파 두목에게 경고하는 장면도 눈에 띈다. 사악한 갱들이 판을 치는 1940년대 상하이에서, 자신을 숨기며 은둔해 지내야 하는 고수들이 갱들을 물리치고 경고하는 장면은 동양인을 괴롭히던 서양인을 물리치는 영화 속 이소룡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이소룡 영화와 주성치의 <쿵푸 허슬>의 서사 구조의 유사성 역시 인상적이다. 이소룡의 영화들은 약자를 괴롭히는 부패한 세력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이소룡은 <맹룡과강>에서 이탈리아 마피아를 물리치거나 <용쟁호투(1973)>에서 동양인을 괴롭히는 서양인에게 복수하여 동양인들에게 통쾌함을 안겼다. 주성치의 <쿵푸 허슬>(과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다. <쿵푸 허슬>의 주성치 역시 악을 물리치는 존재다. 미약하다고 여겨져 왔던 한 개인(주로 약자)이 사회나 거대 담론에 맞서는 영웅이 되는 것은 이소룡과 주성치가 활용하는 단골 서사다.




<쿵푸 허슬>의 원제는 사실 <쿵푸功夫>다. 쿵푸, 단 두 글자로 이 영화를 설명하겠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제목 선정이다. 이는 동시에 주성치가 쿵푸에 진심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기도 한다. <쿵푸 허슬>은 자신을 배우로 만들어 준 이소룡과 이소룡의 무술, 홍콩 무협 영화들의 집대성이며, 이에 대한 주성치의 존경심과 사랑을 영화로 재현한 결과다.


‘감독’ 주성치는 늘 관객이 좋아하는 것을 중요시해 왔다. <쿵푸 허슬>이 전 세계에서 흥행에 성공하면서 주성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영화로 만들고 그것을 관객이 좋아할 때 느낄 수 있는 최대치의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주성치는 그 기쁨을 아는 사람이기에 배우보다 감독으로 더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많은 사람이 좋아해요”라고 말하며 기뻐하는 주성치는, 내가 아는 덕후 중 가장 성공한 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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