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지왕>
매일매일이 망망대해 앞에 선 것처럼 까마득할 때, <희극지왕(1999)>의 주성치는 세상을 향해 ‘노력’과 ‘분투’를 외치며 마음을 다잡는다. 노력과 분투는 둘 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며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의미다. <희극지왕>의 주성치의 목적은 연기를 하는 것이다. 주성치에게 연기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기에 노력과 분투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면 노력과 분투를 할 이유도 없다.
연기에 대한 주성치의 사랑은 무한하고 또 순수하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인물을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바다 앞에서 노력과 분투를 외치는 주성치는 고독하고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작은 뒷모습에서 주성치의 사랑이 순도 100퍼센트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성치는 절대로 자신이 노력하는데도 왜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지, 왜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더 노력하고 분투하겠다고 말할 뿐이다.
배우로서 주성치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꽤 많이 녹아 있는 영화 <희극지왕>은 주성치가 무명배우로 시작하여 홍콩 최고의 배우가 되기까지, 그가 연기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졌을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희극지왕>의 주성치는 이미 연기에 대한 지식이나 열정은 넘치지만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무명 배우다. 이렇다 할 만한 연기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늘 찬밥처럼 무시당하기 일쑤다. 술집에서 일하며 돈을 버는 장백지는 주성치에게 손님을 많이 모을 수 있도록 연기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연기를 지도하는 과정에서 주성치와 장백지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각자가 가진 아픔과 상처로 인해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헤어지고 만다.
이후 주성치는 우연히 유명 배우 막문위의 눈에 들어 주요 배역을 맡게 된다. 관객들은 왜인지 모르게 주성치의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가 찾아온다는 격언이 현실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영화 속 주인공에게는 대개 해당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어느 시점에서는 성공해야 한다. 하지만 <희극지왕>은 그 희망을 충족해 주지 않는다. 주성치는 어렵게 얻어낸 주연 배역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는다.
좌절한 주성치에게 그동안 주성치를 구박했던 조감독 오맹달이 찾아온다. 오맹달은 자신이 진짜 조감독이 아니라 잠입 경찰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주성치를 작전 수행에 필요한 정보원 역할에 캐스팅한다. 주성치가 맡은 배역은 음식 배달부로 위장해 도청기를 배달하는 역할이다. 이제 주성치는 NG도 없고 컷도 없는 상황에서 연기를 펼쳐야 한다.
음식 배달부 역할을 충실히 연기한 주성치는 자신이 실제 총격전에 휘말렸다는 사실에는 큰 관심이 없다. 주성치는 주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든 말든, 오맹달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 연기를 이어나간다(‘컷’이라고 외치는 순간 주성치의 표정이 변한다). 씬이 끝난 뒤 오맹달에게 달려가 자신의 연기가 어땠냐고 물어본다. 주성치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연기에 빠져 현실과 괴리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에게 연기와 삶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희극지왕>은 삶이 곧 연기고 연기가 곧 삶이며, 연기를 해야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주성치의 고백에 가깝다.
주연 배우로 화려한 데뷔를 마친 주성치는 장백지와 재회한다. 장백지는 주성치에게 “당신이 주연이든 엑스트라든 상관없다”라고 말하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주성치와 장백지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을 때, 갑자기 화면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다려,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어!”라는 대사와 함께 화면은 두 인물을 연극 리허설장으로 옮겨 놓는다. 영화는 익숙한 장소에서 시작된 장면을 전혀 다른 장소의 장면으로 전환해 관객의 여운과 기대를 깨뜨리는 메타적 전환을 시도한다. 어디까지가 실제 삶이고, 어디부터가 연기였던 걸까? 이러한 전환은 삶과 연기의 경계를 더욱 불분명하게 만들며, 현실이라는 극장을 인식하게 만든다.
영화 <희극지왕>은 삶과 연기에 대한 이야기다. 주성치에 의하면 삶과 연기는 명확히 구분되는 개념이 아닌 것 같다. <희극지왕>의 여러 인물들은 배우가 아니어도 연기를 한다. 특히 장백지나 오맹달은 배우가 아니지만 연기하는(또는 연기해야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어쩌면 우리도 같은 처지에 놓인 것일지 모른다. 연기를 지시하는 감독도 없고 NG도 없는 무대에 오른 이상, 죽기 전까지 컷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