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어> <신희극지왕>
주성치는 영화 <장강 7호(2008)> 이후로 배우로서의 작품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사실상 배우로서는 은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 여러 매체 인터뷰에서 연기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더는 연기할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내비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 새로운 얼굴이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라는 주성치의 말처럼 주성치는 이제 배우가 아닌 영화 감독으로서 새로운 얼굴을 찾아 나서고 있다.
주성치가 영화 감독으로 전향하다시피 한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다. 주성치는 연기를 하면서도 연출에 늘 호기심을 가졌다. <007 북경특급(1993)>에서는 이력지와 공동 연출을 맡아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식신(1996)>, <희극지왕(1999)> 등을 공동 연출했다. 그 외 작품들에서도 연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주성치는 마침내 단독 연출작 <소림축구(2001)>를 내놓는다. <소림축구>, <쿵푸 허슬(2004)> 등으로 감독으로서도 계속해서 흥행가도를 달리던 주성치는 <장강 7호> 이후로 감독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미인어(2016)>는 주성치 감독 연출작 중 하나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인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바탕으로 하지만, 동화 속 인어들과 달리 이곳 인어들은 그리 순진하지 않다. <미인어> 속 인어들은 부동산 개발을 위해 인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개발하려고 하는 남자를 막기 위해 인어 마을에서 가장 예쁜 인어인 임윤을 세상 밖으로 보내 그를 암살할 작전을 펼친다. 물론 로맨스 코미디라는 장르답게 실제로 남자를 살해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사랑에 빠진다.
<미인어> 역시 패러디와 변주로 가득한 작품이다. 원 텍스트부터가 안데르센의 동화다. 물속에 살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임윤이 인어공주라면 남자 주인공은 동화 속 왕자 포지션에 가깝다. 동화 속 왕자가 영원히 인어공주의 진심을 끝까지 몰라 답답함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처럼 <미인어> 속 남자는 돈밖에 모르는 안하무인에 밉상 그 자체다. 인어들을 대표하기 위해 뭍으로 올라온 임윤과 인간을 대표하는 남자.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이임에도 서로에게 마음이 향하는 것을 도무지 막을 수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암살자와 암살 대상자가 서로에게 빠져든다는 전개는 <색, 계(2007)>와 중첩된다. <색, 계>의 탕웨이가 문 앞에서 양조위를 유혹하는 장면을 임윤이 재현하는 씬은, 유사한 서사 구조를 떠올린 관객들에게 패러디로서 재미를 더한다. <색, 계>에서 양조위가 상류층 부인들과는 전혀 다른 탕웨이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 버렸던 것처럼, 남자 주인공은 인어라는 정체를 숨기려 애쓰며 어설프게 행동하는 임윤에게 빠지고 만다. 서로가 전혀 다른 속마음을 가진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상황에서, 임윤이 과연 정체를 들키게 될까 하는 서스펜스도 나타난다.
양조위를 사랑하게 되면서 비극적 결말을 피하지 못했던 탕웨이와 다르게 <미인어>의 임윤은 나름 해피엔딩이다. 남자 주인공은 인어의 존재를 알고 인어를 지키기 위해서는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돈밖에 모르고 자만심만 넘치는 남자가 사랑에 의해 변해가는 모습은 주성치 영화에서 꽤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플롯이다.
주성치의 인어공주 이야기는 여기에 환경 문제를 더한다. 푸른 바다 ‘청라만’과 그곳의 다양한 생명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영화 내내 유지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과 인어의 화합으로 가능한 일이다. 인어와 인간은 분명 다른 존재지만 주성치가 그리는 사랑은 종을 뛰어넘는다.
큰 제작비를 들였고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둔 <미인어>와 달리, 다음 감독작이었던 영화 <신희극지왕(2019)>은 비교적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다. 흥행 결과도 <미인어>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신희극지왕>이 의미 있는 영화인 이유는, 이 영화가 <희극지왕(1999)>의 리부트 버전에 가까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희극지왕>에서 주성치가 무명 배우를 연기했다면, <신희극지왕>에서는 악정문이라는 여성 배우가 주성치의 포지션이다. 10년 만에 새롭게 돌아온 희극지왕은 전작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르다.
<신희극지왕>의 악정문은 연기에 대한 열정은 가득하지만 10년 동안 엑스트라만 전전하고 있다. 안 그래도 일이 잘 안 풀려 힘든 상황인데 속상할 일만 자꾸 생긴다. 자신은 오디션을 봐도 역할을 따내기 어려운데, 자신보다 예쁜 룸메이트는 단번에 캐스팅이 된다.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줬던 남자 친구는 알고 보니 여자들을 등쳐 먹고 다니는 사기꾼이었다. 촬영 현장에서 엑스트라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는 건 일상이다.
하지만 악정문에게도 언제든 돌아갈 곳이 존재한다. 늘 자신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고 믿어 주는 부모가 있다. 악정문은 부모에게 받은 사랑으로 다시 연기를 사랑할 힘을 낸다. 연기에 대한 사랑 하나만 믿고 뚝심 있게 도전하던 악정문은 마침내 오디션에 합격한다. 엔딩에서는 배우로 성공하여 시상식에서 상을 받기도 한다.
<신희극지왕>은 무명배우의 성공담처럼 느껴지나 사실 지금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청년들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온다고 믿으며 ‘노력’하고 ‘분투’하며 살아왔지만,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에게 바치는 응원이다. 동시에 <신희극지왕>은 분명히 비슷한 좌절과 슬픔을 경험해 보았을 주성치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며 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주성치는 무명 시절이 길었고, 본인이 오디션에 끌고 간 친구(이 친구가 무려 양조위다)는 한방에 붙었을 때 자신은 떨어지는 경험도 해 보았다. 이 때문일까? 개인적 경험을 녹인 이야기를 청춘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 <신희극지왕>은 코믹한 전개 속에서도 줄곧 진지한 태도를 견지한다. 이 영화에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도 이러한 태도 덕분이다.
감독 주성치가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주성치는 타자화되어 왔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그 인물들이 ‘웃기게’ 그려지는 것은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나 웃기다고 해서 그것이 우스운 것은 아니다. 주성치가 하는 희화화는 그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멸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눈물 나게 웃으면서도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을 만든다.
아쉬운 점도 있다. 여전히 영화 곳곳에서 인물의 외모에 대한 개그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주성치의 옛날 작품들을 보면 인물의 외적인 모습을 조롱하거나 신체적 특징을 부각해 웃음을 유발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가 제작된 시대를 고려했을 때 용인되는 개그일 뿐, 현재 관객들의 입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길 수 있는 개그가 되기는 어렵다. 인간을 바라보는 주성치의 시선은 여전히 따뜻하지만, 개그 방식은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