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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를 (왜) 좋아하세요

by 일영

주성치가 누구인지도 모르던 중학생 시절 <장강 7호(2008)>을 봤던 것을 제외한다면, 내가 처음으로 본 주성치 영화는 <가유희사(1992)>다. 처음에는 장국영을 보기 위해 틀었던 영화였는데 라디오실에서 건들대면서 걸어 나오는 주성치를 보면서 주성치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홍콩 영화는 A 배우를 보려고 틀었다가 끝날 때쯤에는 B 배우에게 반하게 되는 마성의 힘을 가졌다.


©영화 <가유희사>

영화 속 주성치는 맹한 건지 시큰둥해 보이는 건지 모를 눈으로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친다. 한껏 오버하며 남의 주먹을 자신의 입에 넣거나, 남의 입에 자신의 주먹을 넣거나(말 그대로다), 빨랫대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연기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가유희사>는 볼거리가 참 많은 영화였다. 헐리웃 영화광 장만옥과의 살벌한 로맨스도 신기한데 <사랑과 영혼>이나 <미저리> 패러디부터 요상한 ‘에펠탑 키스’까지 모든 것을 보여 준다.


공리와 함께 출연한 <당백호점추향(1993)>을 보면서 주성치의 매력을 더욱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살이 조금 올라 통통해진 주성치가 뜬금없이 닭날개송을 부르는 상황이나 공리에게 구애하기 위해 쌍코피를 터뜨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은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경찰국장이 잃어버린 총을 찾는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로 등장한 <도학위룡(1991)>에서 하필이면 학생 신분으로 중학교에 잠입하게 되어 온갖 고난을 겪는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본격적으로 주성치에 빠져들었던 것은, 처음에는 마냥 웃기고 재미있는 영화로만 생각했던 주성치 영화들에서 진지한 면모를 발견할 때였다. 주성치 영화는 늘 경계를 줄타기한다.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애매모호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주성치 영화의 관객에게 주어진 영화적 재미다.


©IMDB

주성치의 여러 작품 중 희비극이 잘 드러나는 <서유쌍기(1995)>는 긴 러닝타임으로 인해 <월광보합> 편과 <선리기연> 편으로 나누어졌다. <월광보합>에서는 ‘털’과 ‘불’ 개그로 관객을 웃음 짓게 만들었던 주성치는 <선리기연>에서 손오공으로 각성한 후 속세의 정을 끊어내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을 밀어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긴고아가 옥죄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자하의 손을 붙잡다가 결국 손을 놓아 버리는 주성치의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손오공이 된 주성치는 과거의 자신과 자하를 똑 닮은 남녀를 발견하고 둘의 사랑을 이어 주기도 한다. 연인을 이어 주고 돌아서 걸어가는 손오공의 얼굴에서는 해방감과 씁쓸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IMDB

이런 진지한 면모는 후기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식신(1996)> 요리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스타 요리사 주성치가 폭로를 당하며 거지꼴이 되어 버리는 것을 영화 시작 10분 만에 보여 준다. 콧대 높고 오만하던 인물이 반성하며 바닥부터 시작해 재기에 성공한다는 스토리는 시대를 막론하고도 익숙한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탄탄대로를 걷던 주성치가 어느 순간 미끄러지고, 어느 순간 다시 솟아날 기회를 잡는 모습은 인생이라는 희비극의 묘사 그 자체다.


<쿵푸 허슬(2004)>에서 주성치는 도끼파에 가입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돼지촌에서 주민들을 불러 모으고 행패를 부리지만 어설프게 덤볐다가 되레 본인이 얻어터진다. 이 영화에서 어딘가 모르게 애잔해 보이는 주성치는 착한 심성을 가졌지만 어릴 적 착해 봤자 손해만 본다는 깨달음을 얻고 건달이 되기로 결심한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다. 주성치는 그토록 소속되고 싶었던 도끼파가 아닌 돼지촌 사람들의 편에 서게 된다.


주성치 영화에는 자신이 어떤 존재라는 사실이나 자신의 내면을 망각하고 살아가던 주인공이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가 곧잘 나타난다. <서유쌍기>의 주성치는 백정정과 자하 중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뒤늦게 깨닫는다. <식신>의 주성치는 쫄딱 망하고 나서야 음식을 대접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식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며, 자신이 전생에 음식을 관장하던 신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쿵푸 허슬>의 주성치는 자신 안의 선한 마음을 돌고 돌아 깨닫는다.


꺼드럭거릴 줄만 아는 <서유쌍기>의 주성치나, 스타 요리사라는 간판을 달고 사람을 깔보던 <식신> 초반부의 주성치, 도끼파를 동경하며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쿵푸 허슬> 초반부의 주성치는 겉으로 드러나는 강한 행동과 대비되게 연약한 자아를 가진 인물들이다. 이들은 동시에 고립되고 소외된 인물들이다. <서유쌍기>의 주성치는 여러 차례 사랑을 잃고, <식신>의 주성치는 배신당해 몰락하며, <쿵푸 허슬>의 주성치는 자신이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 밀려오는 외로움이나 자신의 모습을 자각했을 때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과 싸워야 한다.


©네이버 영화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개체가 주어진다. <서유쌍기>에서는 자하의 눈물이, <식신>에서는 막문위가, <쿵푸 허슬>에서는 롤리팝 사탕(사탕 소녀)이 이 역할을 한다. 이 매개체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자신을 지탱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거나, 정의롭고 선했던 자신의 과거를 발견하고 연약한 자아를 견고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로부터 주성치가 왜 좋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지만, 나는 늘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주성치에 대한 글을 여러 편 쓴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분명한 것은 주성치는 작품 속에서 소외되거나 연약한 인물과 함께였다는 것이다. 어딘가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주성치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내외적 갈등을 딛고 성장하며, 이 성장은 주인공 곁에 있어 주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지탱하는 삶을 꾸준히 이야기해 온 주성치 영화에 위안을 받을 수밖에 없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기, 주성치를 만나게 됐다. 집 밖을 나설 일이 거의 없었던 2020년과 2021년, 밤마다 주성치 영화를 보며 책상을 두드리며 웃곤 했다. 주성치의 작품을 전부 감상한 지금은 처음만큼의 신선함은 없어졌지만 그때 그렇게 행복했던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주성치라는 사람 자체가 주는 위안도 있다. 모두가 그를 미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언제나 처음을 생각하며 ‘분투’한 사람, 그리하여 끝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 주성치를 보면 나와 그는 별개지만 근거 없이 힘이 난다.


맨정신으로 살아가기 참 어려운 세상이다. 사는 게 버거워 세상을 돌아볼 겨를이 없을 때, 또는 세상 돌아가는 꼴이 왜 이런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을 때, 사람들은 주성치 영화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지친 사람들이 하는 현실 도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성치의 이야기는 부조리한 현실을 더 뚜렷하게 인식하며, 동시에 픽션을 통해 위로받을 기회를 준다. 영화를 통해 누군가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의미다. 당시의 홍콩 사람들에게도, 지금의 홍콩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주성치를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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