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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O를 믿지 않는 남자에게 찾아온 UFO

<장강 7호>

by 일영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중국어 선생님께서 이 영화를 틀어 주셨던 날이 생각난다. 덕분에 이 영화의 첫 대사가 “선생님, 안녕하세요”인 것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영화를 소개하면서 주인공을 맡은 남자 배우가 젊은 시절에는 나름 홍콩 미남 배우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주성치와 그의 영화에 대한 아주 주관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 지금도 그를 홍콩 미남 배우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 같다.

<장강 7호(2008)>는 주성치가 배우로 출연한 (잠정적) 마지막 작품이다. 주성치는 2008년 이후로는 배우보다 감독 일에 전념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기를 할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새로운 얼굴이 연기하길 바란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배우로서의 주성치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배우로서 주성치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장강 7호>는 홍콩에서는 크게 흥행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성적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장강 7호>는 지금까지의 주성치 영화와 비교했을 때 서사가 상당히 소박하다. 개를 닮은 깜찍한 반려 외계 생명체가 등장한다는 점이 독특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소재일 뿐이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서로를 아끼는 홀아비와 아들, 그리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 생명체가 이들을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 구조는 <E.T.(1982)>와도 닮은 구석이 많다.


©네이버 영화

<장강 7호> 속 주성치 부자(父子)의 삶은 참 부조리하다. 주성치의 아내는 병으로 죽었고 혼자서 어린 아들을 키워야 한다. 찢어지는 가난도 주성치를 힘들게 한다. 위험한 공사 현장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겨우겨우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냈지만 아들이 원하는 장난감이나 운동화를 사 줄 형편이 되지 않아 밤마다 쓰레기장에서 물건을 찾기 일쑤다. 하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하다. 달달거리는 선풍기 하나 없어도 아들이 잠들 때까지 부채질을 해 주고,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밥까지 굶어 가며 일한다. 주성치는 자신을 무식한 사람이라고 칭하며, 아들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나쁜 말을 쓰거나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보수적 가치를 전수하는 장면은 주성치 스스로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주성치의 아들인 서교(배우는 여자지만, 이 영화에서 남자 역할을 맡았다)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친구들과 싸워 얼굴에 멍이 들고 교복은 찢어진 채로 집에 돌아오자 주성치는 무엇 때문에 싸웠냐고 묻지만, 차마 아이들이 가난을 이유로 괴롭힌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자신과 아버지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것임을 아는 속 깊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선생님에게도 무시당하며, 매번 얼굴이 더럽다고 선생님에게 혼난다.


©네이버 영화

쓰레기장에서 아들에게 줄 운동화를 찾던 주성치는 UFO를 마주하게 된다. 비행접시는 공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다시 날아가 버린다. 아들에게 로봇 강아지 장난감은 사 줄 수 없지만 나름 구색 갖춘 장난감을 줄 수 있어 한결 마음이 좋아진 주성치는 서교에게 공을 건넨다. 그런데 이 공에서 외계 생명체가 태어나고 만다. 서교는 강아지를 닮은 외계 생명체를 ‘장강 7호’라고 부른다. 서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장강 7호의 존재를 믿지만 주성치는 장강 7호를 그저 그런 신종 장난감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너무 어른이 되어 버린 주성치에게 동심은 없다. 장강 7호는 아이들만이 감지하고 느낄 수 있는 존재다.

장강 7호라는 반려 외계 생명체가 생긴 뒤부터 서교의 삶도 조금은 나아진다.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무시당하고 구박당하는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 작은 친구에게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얼굴에 상처를 달게 되어도 이제는 같은 곳에 상처를 단 장강 7호가 옆에 있다. 장강 7호에게 시험에서 100점을 받게 해 달라는 기대도 걸어 보고, 장강 7호의 도움을 받아 늘 자신을 구박하는 선생님을 당황시키는 상상도 해 본다. 하지만 이 모든 상상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강 7호는 그런 종류의 외계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강 7호>은 상당히 현실적인 영화다.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지만, 이 외계 생명체가 인생을 바꾸어 주지는 않는다.


©네이버 영화

서교는 0점 맞은 시험지를 100점으로 고쳤다가 들켜 주성치와 대판 싸우게 된다. 60점을 넘기면 평생 간섭하지 않겠다는 주성치의 말에 본인 힘으로 꼭 60점을 넘기겠다고 다짐한 서교는 60점보다 딱 5점 높은 점수를 받고 기뻐한다. 공사 현장에서 해고당했던 주성치는 다시 일자리를 되찾는다. 그러나 항상 비극은 방심할 때 찾아온다. 일을 하던 주성치는 공사장에서 추락해 죽고 만다. 왜 하필이면 아들과 싸우며 헤어진 날 이런 비극이 찾아온 것일까? 이제야 좀 잘 될 것 같던 상황과 대조적인 비극에 서교는 65점짜리 시험지를 꼭 붙들고 눈물을 참는다.


한순간에 아버지마저 잃은 서교가 집에서 눈물을 쏟을 동안 장강 7호는 주성치가 누워 있는 영안실에서 온 힘을 끌어모아 주성치에게 생명을 다시 불어넣는다. 아침이 되자 주성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들 옆에서 눈을 뜬다. 아들은 주성치에게 말을 잘 듣겠다며, 다시는 어디 가지 말라고 말한다. 주성치를 살려내느라 에너지를 다 쏟은 장강 7호는 방전되어 초라한 헝겊 인형처럼 변해 버린다. 전기 충격을 가하거나 링거를 꽂아도 소용없다.

장강 7호는 사라졌지만 장강 7호의 영향력은 살아 있다. 서교는 장강 7호를 마음속에 담은 채 삶의 의지를 되찾고 책을 펼친다. 더 이상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는다. 친구도 생겼다. 주성치는 아들의 담임 선생님을 쫓아다닌다(학부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제 모두의 삶이 평화로워진 것만 같은 그때, 회복된 장강 7호는 셀 수 없이 많은 친구들을 데리고 서교 앞에 나타난다. 뛰어오는 외계 생명체들의 모습 위로 Boney M.의 ‘Sunny’가 경쾌하게 흐르지만, <장강 7호>가 해피엔딩일 수는 없다. 주성치 부자의 찢어지는 가난은 여전하다. 주성치는 스스로를 멍청하다 생각하면서도 아들은 그렇게 키우지 않아야 한다는 부채감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학교와 사회는 이들에게 여전히 부조리한 공간일 것이다.


©네이버 영화

장강 7호의 능력은 사물이나 사람에게 에너지를 부여하는 능력으로 묘사된다. 물질적인 도움이 시급해 보이는 주성치 가족에게 금은보화를 주는 외계 생명체가 아니라 에너지를 주는 외계 생명체가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장강 7호의 능력이 다른 것도 아닌 ‘살리는’ 능력이라는 것은, 살고 싶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마음의 투영이다. 어쩌면 이 <장강 7호>라는, 영화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죽을 것만 같을 때 귀여운 외계 생명체라는 환상에 기대고 싶은 심리가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힘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지구를 단체 방문한 외계 생명체들의 모습에서 마무리된다. 장강 7호는 당신에게 더 나은 삶을 줄 수는 없지만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위로다.


영화 외적으로도 <장강 7호>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장강 7호>가 주성치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된 영화라는 것이다. 주성치는 8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장강 7호>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주성치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에서 촬영된 영화다. 우리는 <장강 7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연기하는 주성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주성치가 그리는 아버지는, 몸과 정신이 고달프니 아이에게 몹쓸 언행도 하지만, 장난감을 사 줄 수 없는 처지와 슬퍼하는 아들의 모습이 쓰려 밤늦게 쓰레기장을 뒤지는, 누구보다도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떤 영화를 볼 때 그 영화의 내용이 영화를 만든 사람의 개인적 경험이 투사된 결과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천편단률적인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장난감 장면’처럼 주성치가 겪었던 개인적 경험이 <장강 7호> 곳곳에 녹아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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