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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ow김정숙 Apr 23. 2024

아들과 인생동반 네 번째 이야기

보청기를 만나다

아들은 감성이 풍성했다. 

어느 날 유치원 통원차를 타기 위해 준비하는 아침은 분주했다. 

아들 손을 잡고 등원하는 발걸음은 항상 통통 튀었고 달리기를 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나무 서너 그루가 가운데 중심을 잡아주고 서 있었다. 

가지가 늘어진 작은 나무였다. 

 차도가 아닌 곳인데 나무 아래에 자동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아들은 “엄마! 저기 좀 봐요. 자동차가 우산을 쓰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날 자동차는 나무로 만든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고 있었다.

나무 우산


아들은 어려서 콜라를 빨리 배우지는 않았다. 

톡! 쏘는 콜라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 익살스러웠다.

가끔 치킨을 배달시켜 먹을 때 함께 따라온 콜라를 마셨다. 

점점 콜라에 익숙해지면서 치킨보다 콜라에 관심을 가졌다.

 어느 날은 아들은 “엄마! 콜라가 나한테 물을 던져요!”라고 멋있게 말했다. 

한 번도 콜라의 기포 터지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사람은 없었다.      

한글을 알아가면서 무엇이든 읽기 시작했다.

辛라면 봉지를 보며 “푸라면 끓여주세요!”

가락국수라면 국물을 먹으면서는 항상 “아아~ 시원한 바다 냄새!”라고 말하면

라면은 더 맛있어지곤 했다.   

   

5살 때쯤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져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퇴근 후 이사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도중에 살던 아파트를 지나치게 되었다. 그때 아들은 왜 우리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 곤란하여 머뭇거리고 있자 

아들은 “ 엄마! 우리 집이 고장이 났어요? 그래서 고치느라 다른 집으로 가는 거예요?”라고 해서 가슴이 먹먹해지게 하였다. 


우리 그 아이의 말은 엉뚱하면서도 표현이 예뻤다.

감성적인 표현을 자연스럽게 해서 힘든 상황이 미화되곤 했다. 

그래서일까? 가난하여도, 힘이 들어도 웃을 수 있었다.     

손을 잡고 길을 가는 것은 즐거움 자체였다. 

유치원에서 물놀이를 갔다. 

수영복도 새로 사 주었는데 물속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병원을 거부한 것처럼 물놀이를 거부했다. 

선생님들의 갖가지 회유와 설득에도 지지 않는 꿋꿋함이었다고 했다.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아이였다.


뇌막염 후유증을 깜박 잊어버리고 살았다.

부설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신입생 면접이 있었다. 

아들은 간단한 수리력, 국어 읽기 쓰기 등을 테스트받았다. 

그리고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았다. 

청력검사도 했다. 그런데 거기서 걸렸다. 

선생님은 아이를 몇 번이나 재검사를 하셨다. 

그리고 청력에 문제가 있다고 정확한 검사를 받아보도록 안내했다.


나는 요즈음 말로 그제야 현타가 왔다. 

아들이 청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잊고 살았었다.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말을 잘못 이해한 탓이었다. 

공부하는 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곧바로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았다. 결과는 청력 미약이었다. 

뇌막염 후유증으로 난청임을 알고 있었는데 막상 보통의 결과를 받지 못하니 어지러웠다.

 약시는 이해되는데 난청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유명 병원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검사는 한 달 동안 수차례 주기적으로 진행되었다. 정밀검사를 진행했다. 

수면 상태에서 진행해야 하니 수면마취를 했다. 

생후 2개월 4개월 6개월 하다가 멈춘 검사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매번 아이와 전쟁해야 했다. 

병원에 대한 심한 거부감이 그때도 있었기 때문에 검사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원 진료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 가야 했다.

그 어려움을 지나면서도 감사하게도 아들과 나는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KTX 기차가 처음으로 운행되던 때였고 우리는 그 가장 빠른 열차를 경험하며 

하루 동안에 병원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수학 문제집이나 마법천자문을 가지고 다녔다. 

기차 안에서 무료하지 않게 다녀오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곳에서 끝말잇기를 했다. 포켓몬스터 그림을 그렸다. 

아들과 단둘이 여행하는 호사를 누리며 행복함도 있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탔다.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서울에서만이 볼 수 있는 신기하고 놀라운 것을 보았다.

아들도 나도 새로운 문물을 접하면서 즐거운 여행을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15분 정도를 걸어가면 병원이 나왔다. 

아들은 재잘거리며 수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안경 낀 아들의 그림자가 특이했다. 머리 부분에 구멍이 보였다.

구멍 뚫린 머리를 보며 아들은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었고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      


호기심에 이것저것 만지고 집중력 있게 빠져 들어가는 아들을 데리고 하는 여행은 행복했다.

철없이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들을 바라볼 때는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고 눈물도 났다.

아들은 최종적으로 보청기를 착용해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다. 

또 다른 문제는 언어능력 검사에서도 평균보다 2살이나 떨어져 있었다.

또한 음성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들은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문제의식 없이 내 맘대로 아들을 바라본 결과였다. 

수학 문제에 집중하며 정확한 계산 능력을 보여서 오히려 빠른 계산능력에 감탄하기도 했는데. 

한글을 읽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읽고 쓰는 것, 받아쓰는 것도 잘 해냈기에 오히려 영특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휘 능력은 또 다른 분야였다. 

거기다가 발음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은 너무 충격이었다.

일상생활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지의 부모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미웠고 미안했고 속상했다.


아들은 보청기를 맞췄다. 안경을 맞출 때와는 다르게 마음이 편해지질 않았다. 

무엇보다 학교 가기 전 분주함이 더했다. 

아침마다 챙겨야 할 것이 안경, 보청기가 추가되었고 안전성을 일러줘야 했기에 어린 아들에게는 버거운 일상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들이 보청기를 하고 다니자 친구들이 호기심으로 궁금해하며 잡아당기는 일이 생겼다.

아이들은 보청기를 본 적이 없었기에 자꾸 무엇인지 물어보고 신기해했다. 

최대한 겉으로 노출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애들과 자꾸만 마찰이 생기곤 했다.

 아들은 보청기 착용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고

 그런 아들을 달래는데 마음은 더욱 쓰리고 아팠다.


 결국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보청기를 강요하질 못했다. 

점점 벌어질 언어능력의 차이를 겪으며 살아야 했다. 

 그래도 스스로를 사랑하도록 이끌어주는 분이 존재했기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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