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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Jun 06. 2024

허여사님

나의 인제(麟蹄), 나의 인제(Now) 2.

점심을 먹고 허여사님 집으로 걸어가는데 허여사님네 현관문이 열려있는 게 보인다. 실내가 잘 보이지 않아 사람이 있는지 문이 저절로 열린 건지 살펴보는데 안에서 허여사님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오셔, 이리오셔, 이리 와서 놀다 가셔"


공공근로도 안 가시고 경로당에도 안 가시고 점심시간에 오랜만에 뵙는다. 얼른 실내화를 벗고 허여사님이 앉아 계신 소파로 가서 옆에 앉았다.


"여기 감자는 꽃을 다 꺾었나 봐요"(지난주부터 감자꽃 꺾어놓은 것을 보고 있었음)


"아이 꽃을 꺾어야지 감자가 실하게 달린다잖아"(이미 알고 있지만, 고개를 끄덕끄덕)


"감자 캘 때 다 돼가죠?"(허여사님이 감자를 캐면 그다음 주쯤 나도 캐려고)


"아유 아직 멀었어 칠월은 돼야 캐지"(감자를 칠월에 캤었나, 잠시 갸우뚱)


"하지 정도에 캐지 않아요?"(하지감자 생각이 나서)


"아 하지가 이달 이십일 넘어서잖아"(아하, 그렇군요, 또 고개를 끄덕끄덕)


그리고 이어지는 근황토크. 4층에 있는 데다 다른 교무실로 잘 다니지 않는 나는 허여사님을 통해 학교 내외의 각종 소식을 들을 때가 많다. 작년 2월에 학교 청소일을 그만두셨지만 아직도 학교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고 계신다.


허여사님과 나의 텃밭 이야기, 다른 학교로 전근 간 선생님 이야기, 새로 온 선생님 이야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손주 이야기, 경로당 이야기, 허여사님이 좋아하는 가수 이야기 등 대화주제도 다양하다. 둘이 나란히 앉아 비봉산을 바라보다 서로를 바라보다 하며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는다.


"바람이 시원하니 좋네요"


"여름에 저기 뒷문 열어 놓으면 기룡산에서 바람이 불어와서 아주 선풍기 없이도 여름 나요, 여기가 그렇게 자리가 좋다잖아, 뒤에는 기룡산이 있고 앞에는 아미산(내가 알기로는 비봉산인데 허여사님은 아미산이라고 말씀하심)이 저렇게 있어서 이 자리가 그렇게 좋대"


한창 집터 자랑을 하시는데 4교시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쉽지만 오늘 허여사님과의 대담은 여기까지.


장미나무가 벌레먹어 죽는다며 걱정하시는 허여사님 / 고라니가 고춧대 머리 뜯어먹고 간 흔적
허여사님과 나

*허여사님 소개: 올해 87세, 86세 2월(작년)까지 우리 학교 청소일 하셨음. 학교 바로 옆에 살고 계셔서 휴일에도 새벽에도 나와서 청소하셨음. 허여사님 댁 마당을 거쳐서 등하교하는 학생들도 있음.



부록 1.

허여사님 댁의 사계


[봄]

생강나무 꽃 필 무렵, 호미들고 일하시는 허여사님 / 쑥떡과 오미자차를 내주시는 허여사님

[여름]

아침부터 밭 매고 계시는 허여사님 / 허여사님 집 뒤 명자나무 울타리와 밤나무와 오솔길

[가을]

허여사님네 텃밭과 평상과 채반은 쉴틈이 없다 / 헛간에 햇살이 들어와서 쉬고 있다

[겨울]

안방에서 메주가 익어간다 / 장독대에 쌓인 눈마저 허여사님을 닮아 깔끔하다

부록 2.

2020년 5월 16일의 메모


제목: 고들빼기꽃


우리 학교 청소하시는 허여사님

화장실 가는 나를 붙들고 말을 붙이신다

작년에 여기 있던 선생님은 양양으로 갔고

저기 있던 선생님은 안동 사람인데 서울로 시험 봐서 갔고

근데 거기는 자식이 어떻게 되는가?

아이고 왜 아들을 더 안 낳았어?

아무려면 아들이 더 낫지

우리 집은 아들 셋에 딸 둘이야

큰딸은 인제에서 커피숍하고

작은딸은 전라도로 시집갔어

아들이 아무래도 더 신경을 쓰지

우리 집 할아버지가 이발사였어

집 한 귀퉁이에 거울 걸어놓고 학생들 이발 몇 명씩 해줘서 자식 다섯을 키울 수 있나

그래서 내가 보험회사도 오래 다니고 아모레도 오래 했어

그러다 여기 아래 고려병원 지을 적에 내가 병원에 찾아갔지 청소할 사람 안 뽑냐고

그때는 안 뽑는다 하더라고

그러다 얼마 후에 병원에서 전화 와서 오라더라고

그때부터 십몇 년을 청소했지

여기 학교도 내가 찾아가서 청소할 사람 안 뽑냐고 해서 청소하게 됐지

내 나이?

일흔은 무슨

내 나이가 올해 팔십 서이 하며

왕고들빼기 뿌리 같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환하게 웃으신다


*5년 전에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화장실과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만 하던 내게 허여사님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봐 극도로 조심할 때였다. 진로실에 들어오셔서 차 한잔 하시라는 말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4층 복도에 서서 허여사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짧은 대화였지만 감동적이어서, 존경스러워서 내용을 잊어버리기 전에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려 남겨두었던 메모다.



부록 3.

허여사님이 주인공인 디카시


멀리가는 향기

 

우리 학교 청소하시는 84세의 허여사님

여게로 대니는 선생님들 대니다가 넘어지면 안 되잖아, 하시며 눈을 쓸고 계십니다.

사람에게서 향기가 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렇습니다.      


*2021년에 쓴 디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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