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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Jun 24. 2024

또다시, 미니멀라이프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어서

혼자 살면 냉장고, 세탁기, 밥솥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5년 전 인제로 발령받았을 때, 이삿짐센터를 부르지 않고 자가용으로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왔었다. 밥을 해 먹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에 밥솥이 필요 없었다. 대신 전자레인지만 있으면 될 것 같았다.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되는 음식을 먹거나 신선 식품도 먹을 만큼만 구입하면 냉장고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세탁소에 맡겨야 하는 옷 외에는 손빨래할 작정으로 세탁기 대신 세숫대야만 두 개를 챙겨 왔다. 내가 살게될 관사에 살던 선생님이 두고 간 허리 높이의 소형냉장고와 철제 침대 프레임과 매트는 이어받아서 사용하기로 했다.




내가 배정받은 가족관사에는 가스레인지와 벽걸이 에어컨 2개가 비품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방 2개와 거실, 부엌, 화장실, 세탁실, 베란다. 이삿짐이 빠져나간 상태의 가족 관사는 10평 조금 넘는 평수였지만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계획대로 3월에는 손빨래를 했다. 물기를 흠뻑 머금은 빨래는 마르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흐린 날이 이어지면 빨래에서 냄새가 났다. 손목 보호를 위해 빨래의 물기를 최대한 안 짜려고 노력했는데도 한 달이 지나자 손목이 아팠다. 세탁기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달 후 10kg 통돌이 세탁기를 하나 구입했다. 그즈음 남편이 몸이 쑤신다며 찜질방에 가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인제읍 내에는 찜질방이 없었다. 며칠 뒤 소형 안마의자 한 대가 관사 작은 방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며 들어섰다.



그러다 남편(인근 학교 관사에 살던)과 둘째 딸(코로나로 원격수업을 하게 된)이 내가 사는 관사로 와서 함께 살면서부터 살림이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원주에서 냉장고(그 때도 두 대, 원주에 집을 두고 다른 지역에 가서 몇년 살던 살림이 합쳐지면서)와 책상을 옮겨왔다. 관사에 있던 작은 냉장고는 냉장고 없이 살고 있던 선생님께 넘겼다. 그 후에도 원주 갈 때마다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둘 관사로 가지고 왔다.



작년 여름에 전자제품(비품)이 한꺼번에 관사로 들어왔다. 벽걸이 TV,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전자레인지에다 제습기(가족관사라고 2개나 줌, 포장도 뜯지 않고 있다가 6개월 뒤 다음 선생님께 넘김)까지. 가뜩이나 좁은 집에 그전에 있던 가전제품까지 합치니 벽걸이 TV에다 냉장고 두 대, 세탁기 두 대, 전자레인지 두 대, 제습기 두 대, 벽걸이 에어컨 두 대가 돼버렸다. 새 제품에 자리를 뺏긴 통돌이 세탁기와 원주에서 온 냉장고는 작은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집이 창고가 돼버렸다. 물건이 주인이고 사람이 물건 사이에 세든 형국이 돼버렸다.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던 사람의 집이라고 하기엔 짐이 너무 많았다.




남편이 다른 지역으로 가면서 가족 관사에서 독신자 관사로 옮긴 올해 냉장고와 세탁기는 다시 원주집으로 갔다. 주말에만 사람이 사는 원주집에 냉장고가 두 대, 통돌이 세탁기가 두 대가 돼버렸다. 당근마켓에 팔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좀 더 넓게 살 수 있겠지만 언제 또 가전제품이 없는 곳으로 발령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갖고 있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해서 진정한 미니멀리스트가 되려면 멀었지만 나는 여전히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독신자 관사에서는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면서부터 전기밥솥과 전자레인지의 코드를 뺐다. 몇 번 호기심에 사용했던 건조기도 이제는 이불 빨래를 건조할 때 외에는 쓰지 않는다. 전날 밤에 탈수해서 빨래건조대에 늘어놓으면 다음 날이면 다 마르니 굳이 건조기를 돌리지 않아도 된다. 냉장고만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몇 달째 그대로인 냉동실 음식들을 정리하면 사실 냉장고 코드도 뽑고 살아도 된다.



이참에 냉장고 코드 뽑고 살기에 다시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 냉장고를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관사 비품이라 그러지도 못함) 코드만 뽑는 것이니 부담 가질 필요도 없다. 필요하면 또 코드를 꽂으면 되니까. 도전에 실패하더라도 냉장고 코드 뽑고 산다더니 왜 코드를 다시 꽂았냐고 타박할 사람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집 냉장고 코드가 꽂히든 뽑히든 관심이 없다. 그게 뭐가 궁금하겠는가. 누군가 궁금해서 물으면 며칠 하다가 그만뒀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는 생활에 적응해서 이사갈 때 까지 냉장고 코드를 뽑은 채 살지도 모르는 일이다.



냉장고 정리는 금요일에나 해야겠다. 냉장고를 정리하다 보면 버리기 아까워서 원주에 가져가고 싶은 뭔가가 나올 게 분명하니까. 2월에 이사 올 때 못 버리고 끌고 온 안 입는 옷부터 먼저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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