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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천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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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Jun 28. 2024

텃밭이 맺어준 사이

출근하려는데 어르신이 관사 앞 텃밭을 보고 계셨다. 몇 년간 열심히 하던 아침 산책을 올해는 안 하다 보니 아침 운동을 하는 어르신과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반가웠다. 인사했더니 이내 돌아오는 말.


"아, 여기 왜 풀 안 뽑아"


" 다음 주 비 온다는데 비 오면 뽑으려고요"


"여기 풀 다 뽑아야 돼, 근데 감자를 여기 왜 이리 마이 심었어, 저기 풀 난데 저기 내가 호박 한 세 개 갖다 심어주려다 말았어, 올해는 왜 텃밭을 열심히 안 해?"


"혼자 하니까 재미가 없어서요"


"지난번에 보니까 저기 상추가 밑에 다 썩어가길래 내가 뜯어내 버렸어"


"그거 제거 아니고 안쪽 세 골은 다른 아기 아빠가 키우는 거예요"


"아 나는 또 거기 건 줄 알고 뜯어줬지"


그리고 "저기 저 풀 다 뽑아야 돼"라고 한번 더 말씀하시고 가셨다.


어르신과 나는 텃밭이 맺어준 사이다. 2년 전에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아침마다 빠른 걸음으로 관사 앞뒤를 뱅글뱅글 돌며 걷기 운동을 하던 분이라 얼굴만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텃밭을 돌보고 있는 나에게 호박 심은 위치가 잘못됐다며 말을 걸어왔다. 호박을 이랑 한가운데다 심어서 호박 넝쿨이 옆 이랑을 덮으며 무섭게 뻗어가고 있던 때였다. 호박은 많이도 심지 말고 3 포기만 텃밭 맨 끝에 심어서 텃밭 방향이 아닌 나무 쪽으로 타고 올라가게 심으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조그만 텃밭에는 참외나 수박 같은 덩굴식물은 키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입구에 막아선 옥수수를 가리키며 이런 옥수수는 한쪽 끝으로 몰아서 심어야 바람이 잘 통해서 다른 작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도 했다. "내년에는 제가 그렇게 해 볼게요" 했더니 "그래, 내년에는 내가 와서 참견 좀 해야겠어"라고 하셨다.  


관사 옆 빌라에 딸린 작은 텃밭(옹벽 아래 길쭉하고 좁은 공간을 알뜰히 일구어) 농사를 짓는 분이라는 걸 며칠 뒤에 산책 가다 알게 되었다. 공직 생활을 30년 넘게 하고 퇴직했으며 오 년 전에 식도와 위 상단부에 암이 생겨서 위 전체를 절제했는데 이번에(2년 전)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서슴없이 했다. 그러더니 "고추 좀 따 줄까?"라고 했다. 우리 텃밭에도 고추가 있다며 사양하고 가면서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반말이었는데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네 이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 후로도 어르신이 항상 내 텃밭에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웃자란 토마토 곁가지를 꺾어 놓기도 하고 어떤 날은 허리에 손을 얹고 내 텃밭을 바라보고 계시기도 했다. 올해는 텃밭에 하도 사람이 안 보여서 내가 어디로 이사 갔나 생각했다는 어르신이 신경 쓰지 않게 이번 주말에는 텃밭에 난 풀을 뽑아야겠다. 다음 주부터 장마라는데 장마기간 동안 풀들이 텃밭을 귀신의 집으로 만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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