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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Jul 18. 2024

나는 오늘 안녕했는가

- 나를 위한 위로

ⓒ 스침



# 허세

-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허세의 외투를 입고 산다. 허세는 생존을 위한 정글의 무기다. 그러니 가벼운 허세의 외투를 입었다고 탓할 순 없다. 다만 용납 가능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오늘도 내가 입고 있는 허세의 외투가 두터워지지 않게 경계한다. 


타인의 삶을 엿보며 부러워하는 삶은 가난하다. 타인의 삶을 얕보는 삶 역시 같은 이치로 비참하다. 예약을 했음에도 대기 시간이 길어진 정신과 진료실 벽 앞에 작은 달항아리가 자신처럼 진득하게 기다리라고 무심히 다독인다. 1년 넘게 드나들며 눈여겨본 환자들 연령대는 10~20대와 60~80대로 극명하게 갈린다. 젊은이들은 정신과 치료의 편견이 없는 세대고, 늙은이들은 도저히 못 살겠어서 찾았으리라. 그 중간치들은 안 아파서 안 왔을까? 아니, 제 몸 돌볼 시간과 여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부디 모든 이들이 잠들기 전 자신에게 안녕했느냐고 묻고 위로하기를. 




ⓒ 스침


# 정물

- 정지된 사물이 존재할까? 수십 년 한 곳에 위치한 건물도 간판이 갈리고 외벽도 낡는다. 북한산의 바위인들 전날의 그것이겠는가. 인간이 사진과 그림으로 사물을 정물로 기록할 뿐이지 않은가.


- 고1 미술 시간, 선생이 바구니에 든 과일 몇 알을 정물화로 그리라고 했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이모의 제자에게 잠시 그림을 배운 적이 있었지만 싸구려 스케치북에 24색 크레파스가 경험의 전부였던 나는 수채화 물감과 팔레트, 여러 굵기 긴 붓의 매력에 빠졌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선생은 좋은 점수를 줬고, 미술반 영입을 제안했다. 우쭐해지기 쉬운 나이였던 까까머리는 내친김에 이젤과 유화물감까지 사들였지만 실력은 그 이상 늘지 않았다. 전공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모친은 이모 제자의 남편이 운영하는 삼청동 반지하 화실 출입을 허락했었다. 


- 하지만 첫날부터 흥미를 잃었다. 거리에 그릴 사람들이 널렸는데, 아그리파와 줄리앙이란 이름을 가진  양놈들과 눈싸움만 하란 건지 모르겠었다. 그래도 한동안 화실을 드나들었다. 예고를 다니던 긴 생머리의 여고생이 함께 레슨을 받았단 이유면 충분했다. 가슴 시리게도 그녀는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대기하던 외제차에 실려 밤길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사람 죽으란 법 없다. 시린 가슴은 몇 분 후면 놀랍게도 치유됐다. 두 정거장만 지나면 밑단을 줄인 항아리치마를 입고 힘겹게 버스에 오르던 또래의 여고생들은 나를 위로하기에 충분했으니까. 


- 00일보 앞엔 지금은 사라진 나무육교가 있었다. 아주 간혹이지만 용돈이 궁하거나 짜장면에 군침이 돌면 육교를 건너 외삼촌이 재직하던 신문사를 찾곤 했다. 외삼촌의 퇴근을 기다리는 동안 빈 의자에 앉아 <LIFE>를 보곤 했다. 사진 한 장 한 장은 눈길을 사로잡았고 상상력을 자극했으며, 이국적 고급 인쇄물만이 풍기던 냄새와 촉감의 충격은 꽤나 신선했었다. 어쩌면 출판물과의 긴 인연이 그때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 스침
ⓒ 스침



# 다시 허세

비트겐슈타인이 "인간이 나이 든다는 건, 자신의 언어를 정밀하게 세련화하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단다. 이 문장에서 그가 말한 '언어'는 '세계관'이 아닐까? 내재된 가벼운 허세를 부리되, 천박하지 않고 세련되게 나름의 세계관을 잘 정리해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가다듬는 과정을 이르는 말은 아닐까 싶다.


- 담배를 태우러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는 몇 시간 동안 장맛비가 잦아들었다. 장마처럼 며칠째 계속된 두통이 가라앉지 않는다. 편케 잠들긴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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