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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Jul 12. 2024

감옥

- 벗어나야 한다

ⓒ 스침

# 속도

- 이십 대에 차를 몰기 시작해 지금껏 길 위에서 가해자나 피해자가 된 적이 없다. 구석구석 다녔고, 5년 전 구매한 차로도 지구를 세 바퀴 정도 돌고도 그랬으니 천운이다. 그런데 운전을 즐긴 적이 없다. 정속이란 것도 인간에게 '허락된 속도'가 아니라고 생각 들어서다. 두리번거리며 걷기를 좋아했던 탓에 연애했던 몇몇을 고생시켰다. 하지만 느린 걸음과 산만한 시선이 내 사유의 깊이와 패턴을 결정했다고 믿기에 그녀들에 대한 미안함만 아니라면 불만은 없다.       


- 최근, 접으면 가방 하나 크기인 접이식 자전거를 집에 들였다. 요일과 무관하게 전철에 실어 여기저기 다닌다. 나의 자전거 역시 내 걸음처럼 느려터졌다. 걷는 사람보다 조금 빠른 정도다. 인간에게 허락된 속도는 그 정도 아닐까. 최소한 내겐 그렇다. 툭하면 길가에 서서 카메라나 노트를 꺼내드니 실은 걷는 사람보다 빠를 것도 없다. 속도는 나의 시선을 결정하고 사유의 여백을 넓힌다. 네 개의 동그라미를 대체한 두 동그라미 덕에 머리와 다리의 근손실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 스침

# 익숙함

- 요즘 갑갑증에 자주 시달린다. 언어의 감옥에 갇혔다고 느껴서다. 언어는 몸짓의 확장이며 진화의 증거다. 되도록이면 설득의 언어를 구사하고자 노력했고, 같은 이유로 글쓰기도 가지런하길 바랐다. 그런데 턱없이 모자란 깜냥 탓에 자꾸 넘어진다. 이과적 사고를 할 줄 모르니 객관적일 수 없고, 철학의 높은 허들 앞에서 좌절하는 나는 그다지 논리적이지도 않다. 한 자연인이 일상으로 쌓은 경험에 기대 사고하고 말할 뿐이다. 


- 그러니 해도 그만, 안 해야 더 좋을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이다. '나'와 '세상'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다. 나만의 해석을 통해 비관습적 판단을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인식의 지평은 당최 한 뼘도 넓어지지 않는다. 사진을 찍기 위해 눈을 네모나게 뜨고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보이는 것이라곤 거기서 거기, 고작이다. 환장할 노릇이다. 언어의 감옥은 곧 생각의 감옥이다. 생각은 답보하고 육신은 처진다. 왜 나는 확장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가. 발을 떼지 못하는 험한 꿈길을 헤매는 것처럼 무기력하고 두렵다. 모든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익숙함은 결코 내가 거둔 성과이거나 결과물이 아니다. 내가 뭘 잘했다고 내게 익숙한 것들, 가족과 친구들에 반려견까지 나에게 무해하겠는가.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선 익숙함에 지극히 감사해야 한다. 


ⓒ 스침

# 도라지

- 동네 마실을 다니다가 이웃들 텃밭에서 도라지꽃을 자주 목격한다. 내게 도라지는 반찬이나 음악교과서에서 배웠던 타령이 아니라 군 시절 다방의 싸구려 위스키와 담배로 추억된다. 비문 출납을 위해 자전거로 상급부대를 드나들다가 연을 맺은 다방에서 맛본 도라지위스키는 월급 받은 병사의 플렉스였고, 딱 한 잔의 낮술로 겨울이 봄이 되는 연금술이었다. 도라지위스키만큼이나 싼 티 났던 레지 누나의 분 냄새는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다.  


- 누구의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입을 맞춘 여자의 입에서는 김치냄새가 났다"는 구절을 읽고 충격을 받았었다. 여인의 입에서 꽃향기가 아니라 김치냄새가 난다고. 멍청한 열아홉 소년의 환상은 그렇게 깨졌고, 술에 취하지 않고 입을 맞춘 여자의 묶은 머리에서 도라지 담배 냄새가 났었다. 사물은 사소한 경험에 의해 고유한 추억으로 저장된다.      


# 사래

- 자주랄 건 없지만 감정에 사래가 걸리는 날이 있다. 이 나이에 헤어짐의 습작이 없지 않았건만 헤어짐이 낯설 때가 있다. 폭우로 생명 여럿을 앗아간 하늘이 눈이 시리게 파랗다. 자연은 어찌 이리 모질단 말인가. 허망하게 죽은 한 병사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  

ⓒ 스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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