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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Jun 30. 2024

광장의 언어

- 뜨거웠던 하루

ⓒ 스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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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란

- 오래간만에 걸어 찾은 서울역 광장은 혼란스러웠다. 땀은 흘렀고 두루마기를 입은 의사(義士)의 표정은 결연했으며, 그의 그림자로 태양을 피한 노인은 지쳐 보였고, 젊음은 더위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노숙자들을 교화하고 위로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목이 쉬어 있었다.


- 광장은 태생적으로 소란스럽다. 전제주의나 독재가 지배하는 국가의 광장은 평온하고 안녕하다. 소수의 권력자를 찬양할 때나 기능할 뿐, 민중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지 못한다. 반면 민주주의 체제 아래 광장은 소란의 외투를 입고 있기 마련이다. 


- 예전 명절 뉴스의 인트로는 판박이처럼 귀성열차표를 구하지 못한 시민들의 군상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됐다. 1960년 서울역, 1974년 용산역에선 한꺼번에 인파가 몰려 압사 사고가 나기도 했었다. 어린 내가 흑백 TV로 1974년 뉴스를 봤던 기억이 또렷한 건 왜일까? 참사의 의미를 알아서가 아니라 '압사'라는 생전 처음 듣는 단어가 너무 낯설어서였다. 모르는 단어에 대한 열광과 집착은 그때 시작됐던가 보다.



ⓒ 스침

- 나는 그 단어를 후진국형 사고의 대표적 유형이라고 생각했었다. 단순히 생소했다가 철들어 참혹하게 다가왔던 그 단어를 믿기지 않게도 2022년에 다시 들어야 했다. 일간 뉴스를 보니, 당시 사건을 참사가 아니라 '조작' 운운하며 음모론을 제기했던 이들이 비단 생계형 유튜버들만은 아니었나 보다.    


- 검정 교모를 쓰고 있던 나는 출발할 때마다 시커먼 매연을 뿜던 시내버스 안에서 어른들의 어깨너머로 '전남 광주/ 무장폭동/ 불순세력 준동'을 알리는 일간지를 훔쳐봤었다. 말글로는 표현할 길 없는 잔혹한 영상과 사진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대학엘 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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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을 구경하는 아이들의 어깨너머로 "광주폭동은 빨갱이 김대중과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외치는 이들의 스피커는 멈추지 않았다.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가 기세 좋게 펄럭였고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수문장의 적통임을 역설했다. 성조기까지야 그렇다 치자. 이스라엘기는 왜 광화문 광장에 펄럭이는가? 이스라엘 대사관에 문의하면 알 수 있을까? 


- 그들은 '5.18, 세월호 침몰, 코로나 백신, 4.10 총선, 이태원 참사'가 모두 좌파의 조작이라고 외쳤고, 시해당하거나 하야한 전직 대통령들의 초상을 향해 묵념했으며, 억울하게 탄핵당한 전 대통령을 재추대해야 한다면서 당시 수사 검사였던 현 대통령을 지지했다. 저들은 인지부조화 상태인가? 이어진 길에서는 그들이 추앙하는 권력자의 탄핵소추 청원 동의 숫자를 실시간으로 카운트하고 있었다. 깃발과 외침이 난무하는 광화문은 정상적이게도 소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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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모

- 눈두덩으로 연신 땀이 흐르는 토요일 오후 고단했을 그들은 왜 깃발을 들고 광장에 모인 것일까? 그들은 '수모'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주체였던 시절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세력을 용납할 수 없는 거고, 다른 한편에서는 빈번한 법의 이중잣대와 국익 훼손을 수모로 여겼으리라.


- 한쪽은 과거의 사례를 들어 현재를 부정했고, 다른 쪽은 현재의 사례를 들어 미래를 우려했다. 양측의 언어는 모두 '분노'였다. 분노는 가장 손쉬운 방식의 의사표현이다. 격앙된 어조만으로도 상대를 제압 가능하다. 하지만 천박하지 않은 분노는 찾기 어렵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의 언어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낼 뿐이지 않은가.


- 모두가 아스팔트 위로 나간 사이, 천진난만한 표정의 조형물 옆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한 장발의 여름 노숙인은 침묵했고, 충무공 동상 앞 분수에 몸을 맡긴 아이들은 환호했다. 그날, 한반도 남부에서는 장마가 시작되었고 잿빛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 스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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