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쇼팽 그리고
어린 시절 내가 피아노를 사랑하는 모양은 종이 위를 넘실거리는 작은 손가락 그리고 입으로 내는 건반 소리 같은 것이었다. 종이로 만든 피아노 하나에도 행복했던 소녀에게 갑작스레 피아노가 생긴 건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다. 부모님의 선물이었다. 8살부터 6년을 오가던 학원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때이기도 하다. 그렇게 피아노는 내 삶으로 들어왔다.
책을 좋아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것은 피아노가 유일했다. 학원 정기 연주회, 콩쿠르, 교내 합창단 반주까지. 사람들 앞에 설 때면 심장은 고장 난 메트로놈처럼 마구 뛰었지만, 그들을 응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까지 피아노는 모든 순간 매력적인 악기였다. 미처 내보내지 못한 감정들을 에둘러 표출할 수 있는 통로였던 것이다.
20여 년 정도가 지난 지금도 체리 브라운 색의 업라이트 피아노는 거실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 위로 쌓여있는 온갖 악보들 가운데는 쇼팽이 있다. 가끔 피아노 앞에 앉으면 언제나 그랬듯 가장 먼저 녹턴을 펼친다. 야상곡 중 작품번호 9번, 두 번째 곡이다. 특유의 서정적인 멜로디는 나의 모든 신경을 사로잡는다. 내가 쇼팽의 음악을 좇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쇼팽을 더 좋아하게 된 건 조성진의 2015년 쇼팽 콩쿠르 영상을 본 후부터였을 것이다. 평소에는 수줍은 그가 건반 앞에서 보여주는 표정과 터치는 냉철하고 대범했으며 동시에 온화했다. 긴장 속에서도 과하지 않은 루바토와 미스터치를 허락하지 않는 테크닉에는 타고난 재능과 순수한 감정들이 묻어났다. 조성진의 세계는 무르익어가지만, 나는 여전히 콩쿠르 영상을 찾아보곤 한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면서 끊임없이 세계를 확장해 나가야 하는 예술가의 삶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나에게 피아노는 한낱 취미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의미는 못지않게 깊다. 일상 속에서 타인에게 보이는 감정은 대개 정제된 것들이어서 찌꺼기가 남는다. 잔여물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는 분명 악기를 연주하는 일이다. 나의 곁에는 피아노가 있어 참 다행이다.
https://youtu.be/np7S8XR5eFM?si=GC5LUDhKlU1S2w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