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에 다카라즈카로 간 두 명의 조선인 연구생, 그리고 배구자
새로 시작한 드라마 정년이.
저희 어머니가 어렸을 때,(아마도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겠죠?)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그렇게 여성국극을 좋아하셨다고 하네요.
영화도 좋아하시지만, 국극을 자주 보러가셨다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가끔 TV에서 보던 여성 국극은
뭔가 위화감, 그 자체였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어린 나이에는, 국악한마당도 보기가 힘든데
아주머니나 할머니로 보이는 분들이,
미소년 왕자역할을 하며 국악이나 판소리를 부르는게.. 적응이 안된 듯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당시에 젊었던 왕년의 배우이 나이가 드셔서 그랬을 듯...)
(서울 뚝배기나 마당놀이에서 자주보던, 김성녀씨도.. 당시 국극의 어머니 아역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로열 블러드? )
재미있을 것 같아서 드라마 스타트는 안하고,
니코데무스 님이 소개해주신 만화만 먼저 봤는데,
문득, 여성 극극이 언제 부터 시작 되었는지 궁금해서 찾아 봤습니다.
관련 논문을 찾았는데,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읽어보세요.
결론은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모방은 아니라는 것.
논문을 읽어보니, 여성 국극이란, 여성 소리꾼들이, 해방 후 어려운 시기에 생존을 위하여 머리를 맞대고 모은 멋진 결과물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원래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 이라고 불리웠는데, "소녀"라는 이름을 뗀 것.
20년대에는 "소년가극, 소녀가극이라는 것이 유행했다고 하고, 다카라즈카 는 그중 인기있던 3대 가극단 중 하나가 끝까지 지금까지 생존 한 것.
그런데,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도 이 소년/소녀 가극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당시에 굉장히 많이 유행한 것알 수 있었습니다.
전국 각 시도에서, 소년 소녀 가극 대회가 유행이었던 것. 전문적인 극단형태일지(언양소년단은?)
아니면 오디션이나 경연대회 일지 레파토리가 무엇일지는 더 찾아봐야 알겠지만.. 어쨌던 흥미롭군요.
개인적으로, 유행은 2~30년 주기로 반복한다는 30년 주기설을 믿고 있는데요.
저희 할머니께서는 저 당시 10대 정도의 나이 였을테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여성국극을 찾게 된 것은 20년대 어린시절의 향수 때문은 아니었을까?
50년대 국극의 인기 비결이 혹시?
20년대 소녀가극의 인기가 메아리처럼 30년뒤의 여성 국극의 반짝 열풍으로 ?
번진 것은 아니겠지?
하하하..
어랏...
그런데.. 이 소녀가극이 그 소녀 가극이 맞는 것 같습니다.
1926년 4월 23일 조선일보 기사.
조선여학생 두명이 졸업후 효고현에 위치한 음악 가극학교
보총가극학교 즉 다카라즈카가극학교에 입학한다는 기사.
각각 18세, 17세의 경남 김해 출생의 공립 보통 학교를 졸업한, 백성자, 백춘자 학생, 성질이 온순하고 ,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신입생 18명을 뽑는데 두명이 뽑힌것.
1929년 3월 11일 조선일보기자가 오사카에서 취재한 최초의 조선인 타카라즈카 단원 2명 취재 기사와 사진. 두사람이 단원으로 선발 된 것도, 기사로 대서특필됩니다.
당시에 조선에서 타카라즈카(보총)소녀극단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군요.
지금으로 치면 일본에 진출한 아이돌? 보아 같은 걸까요?
아니면 프로듀스 48에 파이널에 진출한, 사쿠라, 나코 ?
110년 이상의 전통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당시에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예전 신문에 "보총"으로 검색해보면 1920년대 1930년대에 엄청난 기사가 검색됩니다.
당시 조선 소녀들에게 보총은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일까?
일본에 한달동안 소녀 십수명을 데리고 견학을 시켜, 다카라즈카를 벤치마킹해서 인사동에 소녀 가극단 극장을 짓겠다는 포부를 나타내는 극장업자 현철씨.
다카라즈카의 레뷰 스타일이 아닌, 독창적 스타일의 소년/소녀 가극단을 만들기도 하는 등, 시대를 불문하고 10대 소년 소녀들은 노래와 춤을 잘추는 젊은 우상들을 동경하는 것 같습니다.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 것.
아이돌의 시조가 프랭크 시나트라였다고 여겼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 이전에 1920년대 소년/소녀 가극단이 있었고 그 이전 청소년들에게도 다른 우상이 있었을 수도 있겠죠.
1930년 라디오 편성표.
방송국이 하나였던 것 같은데, 저녁 8시부터 무려 한시간동안 보총 소녀 가극단시간입니다.
분기별로 한번 씩은, 다카라즈카(보총)가극단의 공연이 정규편성되어 1시간동안 라디오에서 중계될 정도였습니다.
1929년 신문기사 3년전 다카라즈카 가극학교로 떠난, 두명의 소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데뷔에 성공했습니다.
"보총가극단에 꽃같은 조선소녀."
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391435
이 기사에 따르면 두 자매가 다카라즈카 가극단에 응시할 수 있게된 계기가 윤백남 선생이라는 분
후에 서라벌 대학의 초대 총장을 지내기도 한, 분입니다. 아마도 김해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계기가 되어 두 재능 있는 소녀들을 다카라즈카로 보내게 된 것일 듯.
과연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된 것일까?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1920년 당시 조선에 불어닥친 소녀 가극의 인기가, 30년대 40년대 공연 문화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에, 여성 국극의 불씨가 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KCI 논문을 찾아보니, 이 흥미로운 내용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은 2008년 단 1건에 불과하더군요.
오히려 다카라즈카 가극단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은 많이 있는데 말입니다.
이 논문에서는 다카라즈카 가극단보다는, 오히려 소녀 가극단 출신으로 후에 극단을 설립하여 최승희와 대립구도를 이루는 "배구자"라는 분에 포커스를 두고 있습니다.
소녀가극단 시대를 거쳐 30년대에 독립적인 악극단을 성장시켰는데.
이는 20년대에 서양식 레뷰에 바탕을 둔 일본식 쇼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인기와는 별개로, 우리 고유의 요소를 결합시켜, 오히려 당시에 더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는데 요소가 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 부분입니다.
즉, 예술적인 면에서는 최승희의 현대무용도 아니고, 일본 스타일의 레뷰 쇼인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도 아닌 제3의 길을 간 배구자의 악극단이 실제로 대중적인 인기는 더 높았던 것.
https://www.seoul.co.kr/news/plan/choice_history/2012/11/05/20121105021002
사진 한장 뿐이지만, 뭔가 최승희씨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 듯도 합니다.
라고 글을 쓰고 나서..
수수께끼의 여인 배구자씨의 히스토리를 찾아보니? 이 또한 복잡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용연구가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쪽에서는 쇼코쿠사이 텐카츠라고 하는 마술사(1886~1944) 의 제자로 알려져있고.
이 사람은 무용가가 아니라 마술사입니다.
메이지 42년 (1909년)에 있었던 마술쇼의 포스터.....
일본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마술사였던 배구자씨는, 텐카츠의 아들과 연인관계가 되어 파문을 당했다고 하는군요. 평양에서 당시 호텔 직원의 도움을 받아 도망가고 결혼하게 되는데, 후에 함께 극장을 세우고 배구자 무용연구소를 세우게 되는거군요.
당시 신문에서 배구자씨를 일컬어. "기술계"의 패왕전승이라고 하는 의미는 "마술"의 의미가 되겠군요.
[추가]
기승전 배구자씨가 되어버렸는데...
배구자씨의 삶에 대해서는 억측과 허구, 루머 등이 너무 많이 섞여 있는 듯 하여, 가장 자료 검토가 잘되어 있는 듯 한 컬럼을 첨부합니다.
다만, 아직도 출생의 비밀, 고모라 추정되는 배정자씨와의 관계, 평양에서 탈출(?) 할 때는 마치 요즘 아이돌 그룸 외국인 멤버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가 "런" 하는 과정과 비슷하기도 해서 좀 묘한 기분을 주기도 하네요, 특히 당시에, 배구자씨의 탈출 과정을 상세히 보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보도도 매우 석연치 않습니다.
https://dancepostkorea.com/new/board/column/recollection_view.php?b_idx=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