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카페(1)

단편소설

by Peeping

며칠 전, 마침 휴일이 겹친 어머니와 청도 산골의 카페로 향했다. 10년 전 어머니가 할머니와 방문한 곳이라고 했다. 지도에 꽂힌 핀은 꽤나 깊숙한 곳에 있었다. 위성지도로 보았을 때, 주변에 큰 저수지가 있었지만 일대에는 민가나 논밭은 전혀 없었다.


카페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꽤 많은 차들이 있었다. 주차장은 카페 입구에서 도보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그 거리감이 나는 오히려 의도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잠시 세상으로부터 떼어져 걸어가야만 닿을 수 있는 오래된 동화 속 비밀 정원으로 이어지는 초입 같았다.


길 양 옆에는 전나무가 곧고 높게 서 있었다. 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길 위로 그늘을 한 겹 한 겹 드리우는데, 그 모습은 꼭 책장을 넘길 때 생기는 잔잔한 바람 같았다. 전나무 행렬의 사이엔 이름 모를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리해 있었다. 조금 추워진 날씨 탓인지 흙에 파묻힌 뿌리의 향이 코 끝에 맴돌았다.


우리가 올라가는 길은 등산길과도 이어져 있었다. 배낭을 동여 멘 사람들도 보이고, 세미정장에 뾰족 구두로 멋을 낸 사람도 있었다. 복장은 다르지만 다들 행복해 보였다. 어머니와 나는 단출하게 손가방만 나란히 들고 걸었다. 복장이 뒤섞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흐름에 이끌리듯 오르막을 걸어 올라갔다.


카페에 거의 다다르니 오른쪽으로 커다란 저수지가 보였다. 지도에서 미리 보았다지만 그렇게 클 줄은 몰랐다. 하늘에서 바라봤을 때 작아 보였던 저수지는 한눈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컸다. 정오에 가까워서일까, 강렬한 햇빛이 연못 위에 부서져 작은 알갱이처럼 튀어 오르는 듯 보였다. 어머니는 재잘대던 입을 멈추고 그쪽을 오랫동안 바라보셨다. 그 특별한 눈길을 몇 번 본 적 있다.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젊을 시절 얘기를 해주실 때, 어머니의 눈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광채가 깃든다. 운동회에서 육상을 했던 이야기, 방직 공장에서 일했었던 이야기,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간호사가 되었던 이야기까지.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롭다. 그 저수지는 그녀의 특정한 기억을 건져 올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나를 보시곤 물빛이 예쁘네 하며 먼저 발을 움직이셨다.


조금 더 걸으니 카페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워질수록 길게 뻗은 건물의 윤곽이 드러났고, 허리 높이의 낮은 담장 너머로 드넓은 잔디마당이 펼쳐졌다. 잔디밭 위로 라탄으로 짠 듯한 의자들이 제각각 흩어져 있었다. 누구는 모여 속닥대고, 누구는 떨어져 방황하는 듯 놓여 있었다. 꼭 놀이터에서 각자의 세계를 지닌 어린아이들 같았다.


건물은 3층이라고 들었지만 외관만 보면 높은 1층 건물처럼 느껴졌다. 박공지붕에는 기와가 촘촘히 박혀있다. 얼핏 보면 생선의 비늘처럼 보인다. 더불어 그 카페는 층을 도드라지게 드러내지 않고, 마치 내부에 더 많은 것을 감춘 채 조용히 눌러 담아둔 모습이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압도적인 책장이 보였다. 책장은 벽이 아니라 벽이 된 책 그 자체였다. 까마득히 위로 뻗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빵 냄새, 커피 냄새가 서가 사이를 스며들며 책과 공기 사이에 얇게 눌어붙는 듯했다.


그 책들 사이에는 아무런 위계가 없어 보였다. 만화책 옆에 철학책, 의학서 옆에 소설책, 시집과 트레이닝북이 한 줄에 꽂혀있다. 저 무질서에도 어딘가 숨겨진 질서가 있을까. 그 무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단지 주인이 마구잡이로 꽂아놓은 것일까,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무작위로 아무 곳에나 꽂아둔 걸까.


더불어 눈에 띄던 건, 이 1층에는 대부분 노년의 사람들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흰머리를 단정히 묶은 할머니들, 등받이에 느릿하게 기대앉은 할아버지들. 그들 모두가 이 공간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보였다. 책장을 둘러보는 어머니도 점점 이 공간과 잘 어울려 보였다.


카운터엔 연세 많은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짧게 자른 흰머리에 검은 앞치마를 묶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무심한 듯 다정하고 사려 깊었다. 메뉴판은 놀라울 정도로 단출했다.


뜨거운 커피, 차가운 커피, 허브티, 토스트

메뉴판 아래에는 이 카페의 매뉴얼처럼 보이는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읽지 않아도 머무를 수 있고, 머물지 않아도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고른 페이지부터 펼쳐 주세요.”


우리가 커피를 주문하자, 카운터 할머니는 1층은 햇볕이 좋아서 오래 앉아 계시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책장 근처에는 몇몇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들끼리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소리가 시끌벅적했다기보다는 오래된 기둥에서 나는 온기 같은 소리였다. 그들 주위의 책장은 1층에서도 가장 높은 곳까지 뻗어 있었다.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나는 그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책장에 다가서며 콧잔등을 괜히 한번 쓰다듬었다. 민망하지만 그곳을 둘러보고 싶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들 중 네 명의 할머니와 세 명의 할아버지가 거의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연히 고개를 꾸벅 숙였고, 그들도 같은 인사를 되돌려줬다. 그 짧은 인사 하나로, 이 서가 전체가 나를 환영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장 앞에서 제목들을 쭉 훑었다. 색도 다르고, 주제도 다르고, 두께도 들쭉날쭉했다. 살아온 세월이 정리되지 않은 채 꽂혀 있는, 그러나 분명 의미를 가진 어떤 기록 같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초록색 넥타이를 맨 할아버지가 책을 좋아하냐고 앉은 채로 물었다. 나는 요즘은 습관처럼 읽는다고 말했다. 그는 동의하며 책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을 닮아 한 번 익숙해지면 마음이 먼저 알아본다고 하셨다. 그 말을 곱씹고 추천할 책이 있으신지 되물었다. 그는 김승옥의 책이 백미라고 하셨다. 나는 무진기행이 떠올랐지만 내용이 가물가물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가 오히려 내게 추천할 책이 있냐며 되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김훈의 책을 좋아한다고 대답했고, 그는 젊을 때 김훈을 닳도록 읽었다며 웃었다. 그가 좋아하는 책은 칼의 노래였고, 나는 흑산을 꼽았다. 대화가 흐르는 동안 그의 동행들은 우리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적당한 지점에서 말을 끊고 자리를 떠났다.


커피를 받고 1층 한쪽, 어머니가 자리를 잡은 연못이 훤히 보이는 곳으로 갔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곳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좌식 자리였는데, 신발을 두는 곳 옆에도 낮은 책장이 있었다. 그 책장의 옆 툇마루에서는 한 사람이 양반다리로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마 정면의 책장이 풍경일 것이다. 우리가 자리 잡은 연못이 보이는 방도 낮은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음매 없는 통창으로 바깥의 물결이 바로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어머니는 턱을 괴고 연못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시선이 아주 오래 머물렀다. 책상 위에는 어머니가 들고 온 이병훈 시집이 놓여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어머니는 이곳이 너무 좋다며 내게 3층은 다녀왔냐고 물으셨다. 아직 1층도 다 보지 못했다고 말하니 어머니는 예상했다는 듯 쿡쿡 웃었다. 너한테는 여기가 쇼핑몰이지? 나한테는 좀, 고향 안방 같네. 어머니는 필사용 공책을 꺼내며 말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 절반 이상을 마음에 드는 문장을 채집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일 년에 두 권씩, 집에는 60권이 넘는 필사 공책이 반듯하게 꽂혀 있다.


이병훈의 시집과 필사공책을 함께 펼치며 어머니는 내게 3층까지 가보라고 권하셨다. 아들이 좋아하는 책이 있을지도 모르지, 라며 덧붙였다. 다시 신발을 신고 연못이 보이는 방을 나왔다. 1층의 책장들을 조금 더 둘러보려고 했지만, 얼핏 2층의 빼곡한 책장들이 보였다. 지체하다가는 이곳에서 밤을 새 버릴 것만 같아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작은 책장에 책들이 세로로 쌓여 있었다. 그 책장의 책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기억'과 관련된 제목들뿐이었다. 기억의 정치, 기억의 역사, 기억력 키우기… 그리고 가장 상단에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올려져 있었다. 나폴레옹이 기억을 통해 다른 동물들을 지배한 것을 암시하는 걸까. 다른 책장과 달리 왜 이곳에만 기억과 관련된 책들이 있을까. 쏟아지는 질문들을 제쳐두고 2층으로 향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