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 보뱅/ 1984books
맞아. 난 너를 수도 없이 속였어. 나는 남자들과 네 번 여행을 갔어. 내가 서커스단 사람들을
보러 간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불륜 여행을 떠난 거였지. 로망, 우리는 살면서 언제나 바람을
피워. 진정한 삶은 비밀스럽고 은밀하고, 훔치는 거야. 이슬비를 맞으며 걷고, 포장도로 위에
울리는 구두 굽 소리에 기뻐하고, 책에서 문장 하나를 뽑아내어 잠시 마음에 담고, 창밖을
바라보며 과일을 먹는 것, 그것 역시 속이는 거야. 남편과는 상관없는,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기쁨을 밖에서 얻기 때문이지.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잠든 사이에 글을 쓰면서 너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로망에게 한 시간 동안, 그리고 3년 동안 이런 말을 했다. 사실 완전히 그렇게
말한 건 아니었지만, 모든 내용이 그 안에 있었다. 첫날 저녁 그는 울었고, 이어서 웃었다.
그렇다, 그는 웃었다. p.133
크리스티앙 보뱅의 <가벼운 마음>을 읽으면서 '가볍다'의 정의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사비나는 가벼움을 하찮음, 슬픔, 비루함의 감정으로 나타낸다면, <가벼운 마음>의 주인공 뤼시에게 가벼움은 가족(부모, 형제, 남편)이라는 관계에 얽히지 않는 것, 한 장소에 뿌리내리지 않는 것, 태어나서 첫 번째로 부여받는 이름조차 허락하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그 가벼움을 나타낸다. 가벼움을 다룬 두 책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었다. 어쨌든 자유로운 두 영혼, 토마시와 뤼시를 통해 여전히 남성보다 여성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엄격하다는 것을 독서토론을 하면서 강하게 느꼈다.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뤼시의 행동이나 영화약속을 뒤집고 떠나버리는 행동이 무책임하다는 대다수의 평을 보면서 나의 마음는 몹시도 불편했다. 나 홀로 뤼시를 두둔하고 대변하고 있었다.
탁구공인줄 알았더니 볼링공 같았다는 평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가 묵직한 벽돌 두세 개를 삼킨 듯한 찜찜함을 남기는 책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은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이름은 가벼운 것, 성은 무거운 것, 어머니의 웃음은 가벼운 것, 아버지의 우울은 무거운 것, 가출은 가벼운 것, 정착은 무거운 것.
서커스단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이 도시 저도시를 유랑하는 서커스단에서 생활하는 뤼시는 첫사랑 늑대가 죽자 가출을 시작한다. 뤼시에게 가출은 오히려 정착이 아니었을까?
뤼시에겐 아버지, 어머니라는 생물학적 부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맞지 않을 때는 곡예사, 곡마사, 조련사, 고모, 어릿광대 등 13개의 가정을 오가며 생활한다. 마음이 무거운 채로 지낼 수가 없는 구조다.
첫 가출 때 만난 간호사는 바그너, 바벨, 슈베르트를 사랑하는 음악 애호가다. 그녀는 그들을 고양이처럼 어디에나 가볍게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뤼시도 이런 가벼운 존재를 만나는데 바로 뚱보다. 바흐를 뚱보라고 말하다니...
뤼시는 창작자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마른 자들과 뚱뚱한 자들이다. 자코메티, 파스칼, 세잔이 전자라면 몽테뉴, 피카소, 바흐는 후자다. 그녀는 항상 뚱보를 듣는다. 나도 유튜브를 틀어놓고 그녀가 극찬한 소나타 3번을 듣는다.
소설은 호텔에서 자신의 글을 쓰는 현재의 시점과 뤼시의 성장과정인 과거의 시점이 오고 간다. 직감의 다른 이름인 '수호천사'의 목소리를 따라 쥐라라는 시골 동네에 와 있다. 영화 단역배우로 일을 하다가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건 영화를 찍으러 떠나기 직전에 내린 결론이었다.
아니야. 아니, 아니, 아니야. 캐나다가 아니라고. 영화도 유령도 이젠 아니야. 짐을 놔두고 쥐라로 가. 왜 쥐라인 거지? 토 달지 마. 나의 수호천사가 내게 말한다. 따져 묻지 마. 당장 쥐라로 날아가서 호텔 방을 잡고, 모든 이야기를 처음부터 쓰는 거야. 서커스, 중학교, 묘지. 그 모든 걸 백지 위에 잉크로 기록해. 그 후에는? <<그 후>>라니? 너는 네 비법과 암호와 주문을 잊은 거야?
아니, 난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 후엔, 그때 생각하자. p.173
이 소설의 독특한 인물이라면 당연 뤼시의 엄마다. 딸이 가출할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엄마라니, 사랑의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었던 뤼시의 엄마는 서커스단의 많은 남자들의 숭배를 받는다. 웃음이 많았고 음식을 차리는데 2시간이 걸렸고 시간을 허송세월하며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다. 세상을 믿지 않고 오로지 사랑을 믿은 사람. 남편과 쌍둥이 아들, 꽃집 주인남자와 함께 사는 엄마. 자식이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아서 너무 좋다는 엄마, 미쳤다는 형용사로 대변되는 엄마여서 너무 좋았다는 딸 뤼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인생처럼 뤼시가 가출을 하면 서커스단은 카라반을 돌려 그녀를 찾고 다시 다른 도시로 떠난다. 여덟 살부터 열 살까지 여섯 번의 가출을 했고 가명을 썼다. 그러나 아버지가 서커스단에서 잘리자 뤼시는 기숙사학교에 들어간다. 유랑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삶의 형태가 변하는 지점이다. 열 살과 열일곱 살 사이에 그녀의 마음에 통과했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주말에 집에 가지 않았던 기숙사 친구 엘리자베스 그랑빌, 사랑하는 애인이 자동차 사고로 죽자 수녀가 된 아드리엔 수녀, 주말을 책임져 주었던 대모 마리즈 농샬롱, 엘리자베스의 사촌 자매인 바스티엔 오르맹, 처음으로 함께 잔 청년 로망 케르보크.
자신을 위해 시를 써주는 남자를 꿈꿨던 17살 리쉬는 로망과 결혼을 한다. 22살 법학도였던 로망은 뤼시를 만나면서 문학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로망은 소설을 쓰고 뤼시는 향수가게에서 일하며 예술가의 조력자라는 역할 놀이에 빠진다.
단풍나무사건을 계기로 뤼시는 괴물(알방)과 사랑에 빠진다. 이 소설의 세계관은 사랑의 대상을 인간에게 한정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뤼시는 늑대와 단풍나무에게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첫사랑이었던 늑대의 무덤에 꽃을 놓아주기 위해 가출을 하고, 작업실 앞에 서 있는 단풍나무를 지켜준 알방과 사랑에 빠져 바람을 피운다. 뤼시를 인간세계의 도덕이라는 잣대로 평가를 한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간 변종일뿐이다. 수평적인 눈높이에서 가족, 사회, 국가, 지구를 내려다보는 조물주의 시선으로 눈높이를 올려보자. 조물주의 자리에 신이 아닌 나 자신을 놓아도 좋다. 수평적인 눈높이에서 땅에 발을 딛고 이 책을 읽었을 때와 우주의 조물주인 미지의 존재가 되어 물성의 느낌이 없는 가벼운 존재자로 이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정말 다르다. 어쩌면 작가는 뤼시를 통해 무겁게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꼬집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헤이 이봐. 너무 시리어스하잖아. 긴장을 풀고 가볍게 바라보라고!
괴물은 바흐를 좋아하는 첼리스트다. 뤼시는 로망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로망은 3년간 고민한다. 뤼시가 사랑이 식는 타이밍이 나오는데 그건 로망의 원고가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하면서 뤼시에게 연애편지를 썼던 가벼운 로망에서 거친 예술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책을 꼼꼼히 읽으면 뤼시가 먼저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던 상태에서 바람을 피우건 뤼시가 맞다. 오로지 작은 야망과 심각함과 무거워진 영혼으로 변모한 로망을 보면서 뤼시는 사랑이 식었음을 감지한다. 또한 서점직원을 바라보는 로망의 끈끈한 눈빛에서 결혼생활의 회의를 느낀다.
3년간의 이혼 숙려기간을 거친 뤼시는 이혼을 하고 괴물과도 헤어진다. 집으로 돌아온 뤼시는 단역배우로 우연히 일을 하게 되고 진짜 배우로 도약하게 된다. 캐나다 활영을 앞두고 토 달지 말로 쥐라로 떠나라는 수호천사의 목소리를 따른다. 쥐라의 호텔방을 잡고 그녀는 글을 쓴다. 그리고 그곳 요양소에서 만난 할머니와 여행을 떠나면서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생면부지의 할머니를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여행을 떠나는 뤼시에게 사랑과 행운을 보낸다.
문장을 끝내는 온점이나 최대한 뒤로 미룬 마침표 없이, 오로지 쉼표들만 있는 3년의 문장, 3년 그리고 3세기 동안 지속된 사랑 같은 문장, 내가 하지 못할 말을 말하기 위한 문장, 내게 다가와 휘몰아치며 나를 <<나>>로 되돌리려 내게서 모든 것을 지우고, <<나>>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작고 하찮고 근거 없는지 깨닫게 해 준 이 기쁨을. 이 사랑 이전에 나는 태어나지 않았고, 이 사랑과 함께 죽었으며, 없음에서 다른 없음의 상태로 넘어갔다. p.129
나오며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다. 영혼의 소리를 듣고 훌쩍 떠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안도. 이름이 여러 개면 어떠한가? 그때그때 배우의 삶을 연기하는 것도 멋진 일인걸. 식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 할수 있는 용기. 노트북 하나 들고 카페를 전전하는 노마드의 삶도 썩 괜찮다고, 오늘은 오늘의 기분대로 가볍게 키보드를 두드려보았노라고. 여행의 아쉬움은 기차레일로 음료수를 받을 수 있는 철도 카페에서 대신해 본다고...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이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둠, 두꺼운 것- 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 극단은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선명한 것, 뜨거운 것, 가는 것, 존재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는 극단적 이분법이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는 예외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p.1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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