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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커피 Feb 26. 2024

변신

프란츠 카프카/ 문학동네

"아버지, 저것이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다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의 진짜 불행이에요. 도대체 저것이

 어떻게 오빠일 수 있겠어요? 저것이 정말 오빠라면 우리가 자기와 같은 짐승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쯤은 벌써 알아차리고 제 발로 나가주었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계속 살아가면서, 오빠는 비록 잃어버렸을망정 오빠에 대한

기억은 소중이 간직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p.114



 카프카는 1883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당시 상위 10% 만이 썼다는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엄격하고 가부장적이어서 부자사이는 최악이었다.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보험국 관리로 일하며 밤에 글을 썼다. 전업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사업을 이어받길 원했던 아버지와 글을 쓰기 원했던 카프카 나름의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싶다. 카프카에게 프라하는 탈출하고 싶은 공간이었다.  성취욕이 높았던 아버지를 만족시켜야 했고, 최초의 여인이 하필 유부녀였고,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며 사랑도 계속 좌절되었다. 결정적인 건 1917년 폐결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답답한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결국 떠나지 못한 점은 현재 프라하의 보물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죽기 1년 전 도라와는 동거했음) 1924년 마흔한 살 생일을 앞두고 죽음을 맞이한다.

  작품을 불태우고 나머지도 없애라는 유언을 남기지만 평생의 친구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작품을 출판한다. 아마 이 정도가 카프카에 대한 요약일 것이다.


"모든 문장이 나를 해석해 보라고 하면서 어떤 문장도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말이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논제는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된 이유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였다. 그레고르 잠자 본인인가? 가족인가? 였는데 나는 후자에 손을 들었다.

 그레고르 잠자는 아버지의 빚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5시 기차를 타고 출근을 한다. 그는 친구도 애인도 없이 밤이면 신문을 읽고 작은 조각칼을 가지고 액자를 만드는 게 유일한 취미다. 누구라도 이렇게 일을 한다면 번아웃이 왔을 테고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인간은 일만 해도 벌레 취급을 받지만,  일을 안 해도 벌레취급을 받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구는 그레고르의 소심함을 꼬집기도 했는데 나는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장남의 역할을 부여받은 작가 자신의 경험도 투영되었을 거라고 보았다.

 변신의 대상이 고양이나 강아지, 원숭이가 아닌 벌레라는 것은 큰 상징성을 가진다. 하찮은 존재로 느끼거나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벌레'이기 때문이다.

 앞서 읽어온 책들이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과 <희망 대신 욕망>, 비장애 형제들의 경험담을 쓴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를 읽어서인지 그레고르의 모습이 나는 장애로 받아들여졌다.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이 망가진 존재,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는,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존재를 대하는 가족과 하숙인 파출부의 태도가 씁쓸함을 남긴다.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짐, 삶의 무게 같은 갑충의 껍데기를 짊어진 그레고르의 연약한 다리를 생각해 보라. 사업이 망했지만 금고에는 돈이 있었고 아빠, 엄마, 여동생 모두 경제적인 책임을 질만한 능력들이 있었다. 이 모든 걸 그레고르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전가한 이기적인 가족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대화의 부제, 또는 소통의 부족에 더해 입을 닫고 있는 그레고르의 답답한 성향도 한몫을 했겠지만 대화라는 것도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가능한 게 아닐까.


두 번째 논제는 '그레고르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즉 벌레로 죽었는가? 인간으로 죽었는가? 나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하지만 끝까지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바로 청각이다.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 마치 그리워하던, 미지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 그에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 p.66



그레고르가 벌레도 변신한 후 가장 먼저 인간성을 잃은 부분이 '말'이었다. 언어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대화의 단절을 시작으로 시각이 흐려지고 사고 또한 흐릿해지는 걸 알 수 있다.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에 반응한 이후 그레고르는 여동생의 차가운 말을 듣게 된다. 아빠가 던진 사과로 시작해 '말'의 사과를 받은 후 죽게 되는데 그레고르의 죽음은 오히려 간접적인 타살을 당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가장 가까워야 할 사이인 가족에게 우리는 얼마난 많은 사과를 던지고 맞고 살아가는가?

따뜻한 말 한마디, 격려가 새삼 그리워지기도 하다.

 


 보통 변신은 크게 세 가지로 해석이 되는 작품이다.

첫 번째, "노동자= 벌레"라고 보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문제를 꼬집고 있다.

두 번째, 자수성가한 유대인 아버지와 문학을 하고 싶었던 카프카의 부자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세 번째, 철저히 타인의 눈에 의해 나 자신의 존재가치가 결정되어 버리는 현대사회의 풍조를 비판한 현대인의 소외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잠재적인 장애인이다. 하지만 건강의 중요성은 잃고 나서야 깨닫는 어리석은 존재이기도 하다. 사고나 노화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가족 내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보상심리는 누구라도 있을 것이다. 그런 존재가 내가 되었을 때 나는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 또는 그런 가족을 나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까?

 이 책에 나오는 아빠처럼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모습을 보여줄지, 엄마처럼 외면하고 회피할지, 여동생처럼 새로운 권력형 인간이 될지, 하숙인과 파출부처럼 정말 벌레로만 취급을 할지 말이다.

더 이상 가족이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말 신화인지도 모르겠다. 씁쓸함과 슬픈 연민, 그리고 인간은 절대 벌레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만이 맴돈다.


시계탑의 시계가 새벽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내내 이런 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였다 사위가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도 그는 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힘없이 떨어졌고 그의 콧구멍에서 마지막 숨이 약하게 흘러나왔다. p.73



나오며

 인간은 몰락과 자기 극복과 변신의 삶을 무한반복한다는 니체의 '영원회기'를 그레고르가 알았더라면 절대 이런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런 삶을 산다고! 오 마이 갓!

오빠를 동정했다가 짐승취급하는 여동생의 모습이 내 모습일 수도 있다. 장애인을 둔 비장애 형제들의 책을 읽었을 때, '왜 하필 나인가?'라는 물음이 계속 남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프란츠 카프카가 죽은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여전히 아버지와 아들들은 갈등할 것이고, 가족을 위해 누군가는 희생할 것이고, 아프고 병들어 서러울 것이다.

어떤 삶을 살든 후회는 남는다. 단 그 선택이 타인에 의해서인지, 스스로인지에 따라 삶의 질은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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