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웅진 지식하우스
나는 내 작은 정원에 봄이 온 것을 기뻐하면서 콩과 샐러드, 레세다, 겨자 따위의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앞서 죽어간 식물들의 잔해를 거름으로 준다. 그러면서 그 죽어간 것들을 돌이켜 생각하고, 앞으로 피어날 식물들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 본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나도 이 질서 정연한 자연의 순환을 자명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는 이따금의 순간, 내 마음속에는 땅 위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들만이 이와 같은 사물들의 순환으로부터 어딘지 제외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물들의 덧없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서 개인적이고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너무도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p.20
헤르만 헤세, 그에게 ‘정원’은 영혼의 안식처였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작가이자 화가이고 한때 포도농사로 생계를 꾸렸을 만큼 솜씨 좋은 원예가인 헤르만 헤세가 31~37세 사이에 자연에 대해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전 세계인의 정신적 스승인 대문호 헤르만 헤세는 일생 동안 정원을 가꾸면서 살았다. 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도 당시의 문학 흐름과 다른 자기만의 세계를 발표할 수 있었던 힘은, 모두 ‘정원’에서 이루어졌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정원 일은 혼란과 고통에 찬 시대에 영환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작업복 차림으로 밭과 화단을 가꾸고, 돌길을 깔고, 거친 포도원을 일구는 그의 일상을 살필 수 있는 이 책은 인간의 성장기를 왜 자연에서 보내야 하는지, 그리고 인생의 성숙기가 오면 누구나 자연을 찾아가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일깨운다.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직접 그린 사진들도 함께 엮어, 헤르만 헤세의 일상적 면모까지 담아냈다.
▶ 이 책은 2001년에 출간된 ≪정원 일의 즐거움 ≫(이레)의 개정판이다.
헤세가 정원에서 배운 자연과 인생에 관한 진리를 담은 책이다. 흙의 냄새, 꽃의 색깔, 낙엽의 소리, 공기의 흐름 등 정원 일을 통해 배운 자연과 인생의 모든 것, 풀과 나무가 가르쳐 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더불어 그의 삶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목차
1. 게으른 정원사의 즐거움
즐거운 정원/ 보덴 호숫가에서/ 잃어버린 주머니칼/ 잠 못 이루는 밤들/ 자연의 복원
2. 작지만 반가운 손님들을 초대하기
여름목련나무와 난쟁이 분재/ 유년의 정원/ 작은 기쁨/ 아름다운 세계에서 날아온 낯선 손님/ 도시로의 나들이/ 여름 편지
3. 다시, 소중한 것들이 말을 건다
계절의 유희/ 불꽃놀이/ 구름 낀 하늘/ 오래된 나무의 죽음을 슬퍼하며
4. 만약 내가 고독 속에만 머물러 있었더라면
땅으로부터의 행복/ 나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기/ 내면의 부유함/ 나의 오랜 친구였던 복숭아나무/ 보덴 호수와 작별하며/ 정원에서 보낸 시간
-출판사 리뷰
십 대 시절 <데미안>을 읽고 단번에 헤세의 문장에 푹 빠져버린 기억.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방황하던 사춘기를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크눌프>, <황야의 이리>, <유리알 유희>까지 삶의 단계마다 많은 위안을 준 책들이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포기하고 있었던 <유리알 유희>를 읽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이 책에 대한구상단계를 소개하는 장면을 읽고 서다. 1932년부터 43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집필한 그의 소설을 읽지 않고는 헤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박관념이라고 해야 하나. 여전히 어려웠지만 요제프 크네히트 통해 헤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지금 현대에도 관통한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도덕은 타락하고 사람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예술도 그 순수함을 잃어버렸으며, 전쟁과 내란을 겪으면서 황폐해졌다. 인간의 정신과 언어가 상실한 이 시대에 관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삭막한 도시생활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헤세님!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는 나도 도시를 탈출해 한적한 전원에서 정원을 꾸미고 살고 싶다고요.
사실 이 책은 논제를 뽑고 토론하는 책이 아니라 함께 문장을 공유하며 낭독을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책이다. 그럼에도 선택논제가 너무나 좋았다. 단 시간이 너무 짧아서 모두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 이래서 책은 함께 읽어야 하나 보다.
어린 시절 헤세가 책임지고 맡아야 했던 정원에서 반나절 동안 물을 틀어놓아 물바다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평생을 아끼던 주머니칼을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 오랜 친구였던 복숭아나무가 폭풍에 파인 걸 보고 쓴 애도의 글 등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정원을 가꾸며 느끼는 자연에 대한 감상과 소소한 일상에서, 산업, 기술, 문명, 진보, 과학,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까지 헤세라는 한 인물을 다각적으로 볼 수 있는 책이다.
공통된 소감은 이 책은 시간을 두고 음미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은 왠지 기만당하는 느낌이 들었다면 헤세가 말하는 <정원>은 왠지 더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는 회원의 말에 완전 공감이다.
나는 어제 주머니칼을 잃어버렸다. 그 일로 내가 열중하는 철학이나 운명에 대한 준비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소한 분실로 나는 엄청나게 우울해지고 말았다. 오늘도 나는 감상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 잃어버린 칼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긴 삶의 여정을 나와 함께 지나온 주머니칼이 없어진 것을 이토록 아쉬워하니, 나는 영웅적이지도 현명한 이도 못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영웅도 현자도 되고 싶지 않다. 그런 걸 위해서라면 내일도 시간은 있을 테니까. p.24
그러나 나는 이번만큼은 새로 복숭아나무를 심을 수 없었다. 살아오는 동안 꽤 많은 나무를 심었으니 한 그루 덜 심는다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내 안에서 무언가가 그 일을 거부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또다시 새로운 생명을 키우고 삶의 바퀴를 바치는 일을 거부하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는 비워두어야 한다. p.168
잠을 이루지 모하는 것이 주는 교육적 가치를 하나 더 설명하고 싶다. 물론 이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 좀 더 정확히 관찰해야만 한다. 잠을 못 이루는 것은 경외심을 가르쳐주는 학교다. 모든 사물에 대한 경외심, 가장 겸허한 삶 속에 지속적으로 고양된 정취의 향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경외심, 시적 또는 예술적으로 위해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으로서의 경외심 말이다. p.39
나의 이 여름 편지가 자네에게 상기시키는 이리저러한 것을 잠시 숙고해 본다면, 오늘날의 질병이 내일의 건강함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로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네 안에서 다시 한번 깨어나는 것을 느끼게 될 걸세. 겉보기에는 저렇듯 둔감하고 저주스러울 만큼 건강하며 돈과 기계에 매달린 인간이 한 세대가량 바보가 되어 행복한 듯이 지나버리고 나면, 그다음에는 아마 의사나 선생, 예술가, 마술사들을 찾아가 많은 돈을 들여 자기들을 다시 아름다움의 비밀로, 영혼의 비밀로 이끌어주기를 바라게 될 걸세. p.98
힘든 시절에는 수동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면서 자연에 몰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우리 같은 시인들은 무엇보다도 동시대의 사람들이 겪은 것들을 표현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들어서가 아니라 직접 체험해서 알게 될 때에만 할 수 있다. 그것이 격양된 방식이나 감상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든, 아니면 우습거나 탄식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든 어떤 경우에라도 필요하며, 외롭게 어린아이의 걸음으로 발전해 가는 인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오늘 겪는 커다란 고통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과 모든 종류의 존재와 고통을 포용하는 연대감을 부여한다. 견디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p.125
마지막으로 선택논제 하나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를 통해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고통을 포용해야 한다는 헤세의 글에 공감한다. 공감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이유를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는데 다음과 같다.
1. 순전한 이기심 :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2.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3. 역사적 충동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항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오웰은 이 네 가지 동기 중에서 네 번째 '정치적 목적'이 앞의 세 가지 동기보다 앞선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그는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한다. 평화로운 시절이었으면 앞의 세 가지 동기가 더 중요해졌을지도 모른다. 편향적이라고 할지라도 옳다고 믿는 정치적 신념을 위해 글을 쓴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썼더라도 미학적 열정과 역사적 충동이 존재하는 글을 쓰고 싶어 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헤세도 이와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 논제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작가나 시인들에게 던지고 싶었던 논제이기도 하다. 현대의 시인들이 시대정신을 담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한 논제였는데 단지 표현방식이 그때와 지금 달라졌을 뿐 지금의 시인들도 시대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단지 표현에 있어 리얼리즘이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개인의 감정, 고통 속에도 시대는 묻어나기 때문이다.
단 문학이 정치의 시녀가 되는 것, 조야한 리얼리즘이 숭앙받는 문학풍토에는 모두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다.
1년에 서평을 부탁한다며 출판사에서 보내오는 책이 500여 권. 그 많은 책 중에서 아니다 싶은 책은 땅에 묻어버렸다는 플렉스한 헤세님. 책은 많은데 묻을 땅이 없네^^
내 작은 공간에 있는 초록이들의 창조주로서 더 다정한 눈길과 관심을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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