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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 백 Jul 01. 2024

몰입 그리고 세상과의 공명

비전공생이 만점 받은 미학의 이해 기말고사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너와 나를 우리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의문들은 한 학기 내내 나의 사유의 중심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류적 공동체 아래 개체성을 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언어화할 수 없는 감정과 현상들 속에, 예술은 어떻게 사회 속 개인들을 매개할까? 이러한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동안의 사유를 바탕으로, 이 주제에 대해 ‘너’와 ‘나’의 타자성으로 발생하는 전달론의 한계를 이야기할 생각이다. 또한 ‘너와 나’를 ‘우리’로 공명하게 하는 요소인 몰입과 내러티브를 중점으로 표현론을 옹호하고자 한다.


 우선 전달론의 기본 전제인 ‘전달한다’에 근본적인 모순이 있음을 짚고자 한다. 바로 뾰족한 감상자란 존재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뾰족한 감상자란, 예술가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하는 감상자를 뜻한다. 일례로 한 예술가가 ‘코로나 시대, 공동체 정신의 붕괴’를 주제로, 키네틱 아트를 모티프로 한 조형물을 만들었다고 하자. 감상자가 이 예술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코로나 시대'를 겪어보았고, '공동체 정신'이 무엇인지 알며, '붕괴'를 인지하는 상황적 인지를 바탕으로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게다가 그 슬픔과 허탈함까지 공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개체성과 타자성으로 인해 ‘온전한 전달’은 어렵다. 전달이란 직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대상 간의 많은 공통적 요소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술가가 쏜 의도의 화살이 감상자에게 명중했다고 하더라도 그 감정이나 전달의 정도는 주관적이고 측정 불가능하다는 또 다른 어려움이 생긴다. 이처럼 전달론은 어떠한 의도 하에, 감상자를 예측하고, 그로부터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부터 근본적으로 수많은 한계를 수반한다. 이렇듯 전달이라는 모순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목적을 둔 예술은, 신기루의 물을 좇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전달론적 시각은 예술품들을 목적마저 상실한 납작한 예술로 전락하게 만든다.


 한편 표현론은 가장 인간다운 예술 이론이다. 표현론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어떠한 메세지를 던지고, 자기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여타 목적들로부터 스스로가 자유로울 때 비로소 예술가는 그 안에서 솟아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싱클레어의 세상을 일깨웠던 데미안처럼, 표현론은 예술가의 표현의 지평을 무한 확장할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한다. 자기 검열 없이,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온전히 예술가 본인에 집중할 때 비로소 ‘몰입’의 조건이 충족된다. 이때, 예술가는 비로소 개인의 한계를 해제하며 그 창조성과 미의식을 최대한으로 발현시킨다. 인간의 몰입 상태에서 개인의 아름다움을 쏟아부은 작품은 그 순간의 현존성만으로 강한 아우라를 띤다. 이렇듯 표현론은 자유롭고 폭발적인 창작의 땔감이 된다.


  소통과 공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작품은 사회적으로 고립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반박한다. 몰입을 바탕으로 한 창작 자체가 인간다운 공감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을 한 분야에 쏟아부은 사람들을 보고, 같은 직업이 아닐지라도 그 내러티브에서 숭고함을 느끼곤 한다. 일례로 청소라곤 집안일이 전부였던 내가, 노동자 인터뷰를 통해 청소를 업으로 삼는 '미화'원들의 주름진 손끝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듯이 말이다. 또한 영화 ‘위플래쉬’의 감상자들이 설령 드러머들처럼 미묘한 박자감을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향한 주인공들의 집착에 공감하고 감명받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감정, 집중, 고난과 극복같은 인간 본연적인 서사는 특유의 공명감을 갖는다. 공명이란, 내부에 완전히 집중하고 가장 개인적인 것을 최대로 발현시켰을 때, 사람들을 끌어내는 공감적 내러티브를 의미한다. 몰입이 낳는 근원적 내러티브는 가장 개별적인 것이 가장 공통적인 것이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임을 역설한다. 따라서 온전한 표현 자체만으로 전달의 조건이 일부 충족된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적막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표현론이란 오아시스와 같다. 나 역시 현재의 시대와 사회 속 개인으로서 표현론을 옹호한다. 우선 나는 문학과 철학 코너의 베스트셀러 동향을 좇으며 시대를 이해한다. 최근 문학에서는 데미안이나 인간 실격처럼 ‘개인다움’ 과 ‘사회적 시선의 탈피’를 주제로 한 작품이 인기이며, 철학에서는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이 주목받고 있다. 이 작품을 홍보하는 캐치프레이즈‘언제까지 남 눈치를 볼 것인가’라던가, ‘삶은 원래 고독하며 혼자 살아가는 것이다’ 에 열광하는 독자들을 보며 현대인들의 갈증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고독을 각오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갈망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바라본다. 자유를 표방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하에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살고, 사회생활이라는 명목으로 진심과는 다른 행동을 하며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별 의도 없이 표현에만 충실한 예술이 일종의 대리만족적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의 온전한 발현과 진정성을 중시하는 표현론은 현대인들의 메마른 자아실현 욕구를 채우는 생각의 샘이 된다. 이렇듯 표현론의 내용은 현 세상의 갈증을 채우고, 표현에 충실한 작품은 전달적 의도 없이도 그 자체로 세상과 공명하는 내러티브를 갖게 된다.


  지금까지 전달론의 한계를 짚고, 몰입과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현 시대의 인류를 공명시킬 수 있는 표현론을 옹호하였다.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고 그 파장을 예상하는 전달론적 시각이 표현론의 비판점을 일부 보완할 수는 있겠으나, 본질은 표현론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언제나 개인을 자유로이 풀어주며,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잠재적 나'를 세상에 마음껏 풀어놓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럴 때에 인간 정신의 궁극인 몰입의 쾌를 바탕으로 진정성있는 작품이 탄생한다. 그럴 때에 사람들은 그 독창성에 끌려 작품을 들여다보고 감상자와 예술가는 공명한다. 이렇듯 의도치 않은 공명감과 해석까지도 끌어오는 표현론은 예술의 궁극이자 창작의 한가운데에 존재한다. 흰 도화지 위에 물감을 터뜨리는 예술가의 자유에서 해방을 느끼는 나 역시, 예술을 억압하는 모든 도덕과 평판을 벗어던지고 표현에 집중하며 살아갈 것이다. 내가 표현에서 쾌를 얻는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로, 표현론은 나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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