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도래, 눈에는 색깔이 없다
서늘한 바람이 닫힌 문을 두드리고 냉기가 유리창에 볼을 맞대어 한랭함이 가득 느껴지는 계절. 그러나 그가 다가오는 길에는 태초의 나무들이 하늘을 뾰족하게 우러르고 또 오색의 낙엽들은 색을 잃고 흑백으로 나뒹굴어 왠지 모를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계절. 최초의 계절을 상상하면 떠오르는 가장 계절다운 계절. 바야흐로 겨울의 도래다.
할 일을 잔뜩 미뤄뒀다 왜냐하면 걸어오는 길에 색깔을 모조리 떨궈낸 무채색의 나무 때문에: 바람이 몹시 불었고 가시만 남아서 단출하다 뼈를 부닥치며 겨울이 부는 방향에 맞추어 나부끼는 겨울나무, 그 밑에서 서서 돋아낸 가시들 틈에서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십일월의 밤하늘을 본다. 바야흐로 겨울의 도래다.
어떤 것은 미뤄둬도 당겨온다 첫눈이 온다 내년에는 조금은 일상적인 소원을 빌어야지 그때의 나는 입시 그런 거 말고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살고 있겠지 생각했던 작년의 내가 그토록 아껴두던 첫눈이 덜컥 온단다 의미는커녕 시간이 나를 보내고 있는 삶 속에서 첫눈에게 넘겨줄 여유는 애진작에 얼었고 겨울을 준비하기에는 내 가을은 너무 짧았기에 초라하게 겨울에게 문을 열어낸다. 푸대접에 냉소를 비추는 것은 계절도 마찬가지. 겨울이어도 무방비한 자에게 첫눈을 맞을 자격 따위 줄 리가 없으니 덩그러니 서서 얼음비만 바라보게 되네. 첫눈이 지나간 자리에는 의미가 남건대 오늘의 무엇에는 남길 어떤 말도 생각도 없어서 그냥 추웠던 날으로만 오늘을 기억하게 되겠지 이것이 겨울이 내리는 형벌이며 죄명은... 바야흐로 겨울의 도래다.
계속 미뤄두고 싶다. 어쩌면 평생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특별할, 어떠한 ‘의미’를 찾아서. 그 의미와 함께하는 첫눈을 바라고 있기에 평생 즐길 수 없는 첫눈과 매년 함께하며. 그래서 일생에 딱 한 번의 첫눈을 찾기 위하여 연명하는 중이라면. 딱 한 번의 첫눈이 오는 날에 도래할 행복한 종말을 꿈꾸는 중이라면. 찝찝한 첫눈과 함께 시작하는 이 계절을 그래서 더욱 사랑한다면.
십일월의 마지막 날 오전 2시 44분. 오늘. 한때는 내일이었던 오늘. 어제에게는 오늘이었던 어제. 존재하지만 마주하지는 못한 29일의 첫눈. 12월의 도래. 겨울의 시작. 여전히 덩그러니 남아있는 상태. 개체성의 비애. 한때는 무언가였을 대상들의 이름. 한때는 누군가였던 사람들과 함께. 겨울. 노트북 위에서 나무가 나부낌. 글 쓰는 행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겨울에게 보고함.
바야흐로 겨울의 도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