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맥주 한 잔을 기다리는 마음

기억을 부르는 계절, 그리고 한 잔의 맥주

by AGING WELL

여름밤, 맥주 한 잔을 기다리는 마음


추운 겨울엔 따뜻한 어묵에 사케, 칼칼한 국물엔 소주가 떠오른다.
더운 여름엔 치킨과 맥주가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계절과 그날의 공기에 따라 어울리는 술이 있다.


추운 겨울 영하의 퇴근길, “맥주 한잔할까?”라는 말은 말 자체로는 이상하지 않지만, 막상 그 제안에 응하려면 어딘가 어색하다. 계절이 주는 감각은 그만큼 명확하고도 강력하다.



나에게 맥주가 간절하게 생각났던 시기가 있다. 두 번의 임신과 수유 기간이었다.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고 겨우 재운 뒤, 거실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던 여름밤은, 모성애 하나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기도 했다.


복직을 앞두고 모유 수유를 중단하기로 결심한 날, 참았던 갈증을 맥주 한 잔에 담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 한 모금은, 말 그대로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마셔버릴 만큼 강렬했다.


그날 나는 알게 됐다.
맥주 한 잔이 기다림 끝에 오는 어떤 해방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여름밤에 맥주가 생각나는 이유는 단순한 갈증 해소 그 이상이다. 하루를 열심히 살아낸 몸의 열기를 식히고 싶은 본능이자, 시원한 한 잔으로 무더위를 밀어내고 싶은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여름은 맥주 소비가 가장 많은 계절이다. 열대야와 야외활동, 휴가철이라는 배경에 맥주의 청량함이 잘 어울린다. 한강 둔치에 깔린 돗자리 위에는 소주보다는 맥주와 치킨이 놓여 있고, 여름 저녁 편의점 테이블에는 가족이나 이웃과 나누는 맥주 한 캔과 과자가 놓여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릴 수 있는, 흔하지만 그래서 더 강하게 남는 장면이다.




나는 평소 반주를 즐기지 않는 편이다. 맥주는 배가 금방 부르기 때문에 식사를 간단히 하고, 따로 맥주만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야 불편함 없이 맥주 본연의 맛을 더 정확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름에는, 특히 여행지에서는 이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걸은 피로와 더위,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마주한 낯선 음식과 사람들 사이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그 순간을 완성해주는 조각이 된다.


이번 여름에도 유럽 여행 중 틈틈이 맥주를 마셨다. 바르셀로나의 노천카페, 칸의 테라스, 파리의 좁은 골목에 숨은 바, 이탈리아 남부의 햇살 가득한 해변.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괜찮았다. 그냥 그곳에 앉아, 그 나라 맥주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유럽의 여름은 태양을 즐기는 사람들로 노천 카페는 늘 북적거린다. 한국같아서라면 꼭 실내로 들어가겠지만 유럽에서는 나도 그들 따라서 야외에 앉아 맥주를 즐긴다.



남편과 함께한 여행을 추억할 때면 “거기서 뭐 했지?”보다는 “그때 마신 맥주, 진짜 맛있었잖아”가 먼저 나온다. 기억을 떠올리는 열쇠가 결국은 그 한 잔이었던 셈이다.


남편의 SNS 배경화면은 아직도 15년 전, 우리의 신혼시절, 유럽여행 중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도나우 강변에서 마신 맥주 사진이다. 해가 저물 무렵, 강바람을 맞으며 마셨던 그 맥주는 여전히 우리 부부가 꼽는 ‘가장 맛있었던 맥주’ 중 하나다.


KakaoTalk_20250710_231038409.jpg 낮이 긴 여름 날 늦은 오후, 오스트리아 비엔나 도나우강변에서 맥주 한잔. 맥주의 거품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맥주는 기억이다. 더 정확히는 좋은 기억이다.
그 시간을 함께한 공간과 온도, 대화와 감정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




사실 고민이나 걱정이 있을 때 맥주를 찾는 경우는 많지 않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도 맥주는 고독한 술보다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술로 그려진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마신다기보다는, 좋은 시간을 더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 마시는 술이다.


그래서일까.
이 여름밤이 그리 싫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내가 또 한 잔의 맥주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이 되면 맥주가 생각나서]의 첫 연재 글입니다. 여름과 맥주를 주제로, 매주 금요일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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