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헨에서 기차를 타고 막 퀠른역에 도착했다.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은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했다. 고개를 거의 90도 위로 꺾어야 겨우 두 개의 첨탑 끝이 시야에 닿았다. 말로만 듣던 퀠른 대성당(Kölner Dom)이었다. "대성당만 보고 와도 퀠른에 갈 만해"라고 말하던 동생의 말이 떠올랐다. 사암으로 지어진 대성당의 외벽은 비와 바람에 닳아 군데군데 검게 변해 있었다. 검은빛은 하늘로 치솟은 성당을 투명한 하늘과 대비시켜 더욱 웅장하게 만들었다. 오래된 비밀을 숨기고 있는 한 덩어리의 검은 산이 도심 한가운데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자, 대성당에서는 오르간 연주가 한창이었다. 성당 중앙 위쪽 공간으로 오르간이 있었는데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선물처럼 쏟아지는 연주 소리에 나와 아이는 그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몇 년 전, 마케도니아의 작은 호숫가 마을 오흐리드의 성당에서 들었던 오르간 소리와는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날카롭고도 묵직한 음이 성당의 벽을 타고 사방으로 번지더니, 메아리처럼 크고 깊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웅장한지 공기의 흔들림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아이는 처음 듣는 오르간 소리에 겁을 먹었는지 내 손을 잡아끌며 성당 밖으로 나가자고 재촉했다.
"엄마,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이랑 너무 비슷해. 충분히 봤으니까 이제 나가자!"
친구가 꼭 가보라며 알려준 향수 가게 'Dufthaus 4711'에도 들렀다. 프랑스 군대가 에전에 퀠른을 점령했을 때, 시내 건물마다 번호를 붙였는데 이 향수 가게의 번호가 4711이었다고 한다. 잠시 머무는 사이에도 관광객들은 끝임없이 들어왔다. 향수를 좋아하는 남편이 떠올라 얼른 하나를 고른 뒤,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와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렸다.
"이제 슬슬 가도 되겠다."
우리는 마트에 들러 과일 주스 세 병을 산 뒤, 미리 받아둔 주소를 구글 지도에서 검색하고 길을 나섰다. 약 20분쯤 걸었을까, 낯선 동네의 한 모퉁이에 교회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우리가 퀠른을 찾은 진짜 이유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벨을 누르자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나는 숨을 한 번 길게 내쉬고 계단을 올랐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윤예림이라고 합니다. 혹시 마크 씨 맞으세요?”
마크 씨는 미소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나와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오늘 우리가 참여하기로 한 시민단체 'Über den Tellerrand Kochen(접시 가장자리를 넘어 보다)'의 봉사자였다. 이 단체는 이번에 새로운 책을 준비하며 자료를 찾던 중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이주민 단체는 대게 현지인이 이주민을 일방적으로 돕는 시혜적인 성격이 진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독일 현지인들과 다양한 이유로 국경을 넘어온 이주민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만들며 서로를 이해하는 평등한 공동체였다. 베를린에서 시작된 이 모임은 이주민이 많은 도시 퀠른에서도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독일 도착한 뒤, 아이와 함께 방문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냈고, 우리가 와도 좋다는 답변을 받았다.
약속된 일곱 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손에는 야채와 고기, 빵이 가득 든 봉지를 들고 있었다. 이주민들도 다가와 반갑게 인사해 건넸다. 한국에서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국적도 아주 다양했는데 튀르키예, 이란, 레바논, 예멘, 콩고민주공화국, 소말리아, 리비아까지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주방과 테이블 곳곳에 자리를 잡고 요리 준비에 들어갔다. 오늘의 메뉴는 치킨 케밥, 파투쉬 샐러드, 렌틸 수프, 피타빵, 그리고 자두와 과자 부스러기로 만든 플통멘슈트로이젤쿠헨이었다. 독일의 디저트와 이주민들의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들이었다. 한쪽에서는 야채를 씻고 샐러드에 들어갈 야채를 다듬었고, 다른 쪽에서는 닭고기를 잘라 꼬치에 끼운 뒤 오븐에 넣었다.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렌틸콩을 씻어 올리브유에 볶은 다음, 커다란 냄비에 넣어 푹 끓이기 시작했다. 다른 쪽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칼로 작은 조각으로 자른 후, 뜨겁게 달궈진 기름에 넣어 바싹하게 구워냈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작은 조각으로 자른 뒤, 뜨겁게 달궈진 기름에 넣어 바삭하게 튀기는 손길도 분주했다. 나와 아이도 칼을 들고 야채를 썰어 샐러드 통에 담았다. 내가 소스를 넣어 간을 맞추는 동안, 아이는 수저와 포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요리가 끝나자 사람들은 각자 접시를 들고 먹을 만큼 음식을 덜어 자리에 앉았다. 자리는 정해진 순서 없이 자유로웠다. 내 왼쪽에는 이란에서 온 난민 여성분이, 오른쪽에는 독일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친 튀르키예 여성분이 앉아 있었다. 식사를 시작하며 나는 이란 여성에게 독일에 오게 된 이유를 조심스레 물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모임 전, 담당자가 미리 알려준 말이 떠올랐다. 이곳의 이주민들 대부분은 정치적인 이유로 난민이 되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대신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하며 한참 웃었다. 상큼한 디저트를 한입 가득 넣던 순간, 이란 여성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독일에 온지 오 년이 됐어요. 이란에서 제 목숨을 위협하는 '어떤 이유'때문에 난민이 됐죠. 독일 정부가 집도 제공해 주고, 매달 생활비도 일부 지원해 줘요. 트라우마 치료도 받으며 이제는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예전과 비교하면 훨씬 행복하다고 느껴요. 이제는 본격적으로 일을 찾을 힘이 생겼어요. 이란의 여성 인권의 현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언제든 연락해도 괜찮아요."
웃음과 이야기가 끊이지 않던 식탁 위에서 모두가 친구가 되는 경험을 했다. '접시 가장자리를 넘어 보다'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정리에 나섰다. 남은 음식은 이주민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포장했고, 설거지를 하고, 물에 젖은 그릇들은 마른 수건으로 닦아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았다. 아이는 식탁 위에 놓인 그릇들을 주방으로 가져왔고, 나는 설거지를 도왔다. 10시가 훌쩍 넘어서야 모임이 끝났을 때, 우리가 집에 돌아오지 못할까 걱정한 동생은 아헨에서 차를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하룬아, 모임이 어땠어?"
"이모, 정말 좋았지!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많이 했어. 나 갑자기 독일어 배우고 싶어졌어. 독일어 못하니까 대화하기가 너무 힘들었거든. 근데 웃긴 일 있었어, 이모. 우리가 기차가 끊겼다고 하니까 옆에 있던 튀르키예 이모가 자기 집에 손님방 있다고 자고 아침에 가도 된다는 거야. 그건 좀 심한 거 아냐? 그렇게 갑자기 친해지면 안 되지! 그 사람 취미가 뭔지, 몇 살인지, 그런거 다 알아야지!"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기차를 타고 보훔으로 갔다. 그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산박물관(Deutsches Bergbau-Museum Bochum)이 있었다. 티켓을 끊고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방문객들과 함께 가장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터널로 내려가야 했다. 실제로는 17m 정도를 내려가지만, 어둑한 조명과 쇳소리, 쉴새 없이 전해지는 진동 덕에 진짜 탄광 깊이인 1킬로미터 아래로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는 정말 지하 깊숙이 들어간다고 믿고 있었다. 좁은 공간 때문인지 나 역시 숨이 약간 막히는 듯했고, 공기가 점점 묵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긴 터널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순간, 내 마음이 파스를 바른 듯 화끈해지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괜찮아?"
"하룬아 엄마 갑자기 눈물이 났어. 한국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오는 데도 생각보다 엄청 오래 걸렸잖아. 그런데 1960년대에 가족을 떠나서 돈을 벌러 이 먼 땅에 와서, 수백 미터 아래로 내려가 하루 종일 일해야 상상하니까 갑자기 슬퍼진거야. 말도 안통하고, 하루종일 햇빛도 받지 못한 채, 먼지 가득 마시며 일했을 거 아니야."
광산 터널을 둘러본 뒤, 우리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A자 모양으로 높이 솟은 권양기로 올라갔다. 한때 광부들이 지하로 내려가거나 석탄을 지상으로 끌어올릴 때 사용하던 시설이었지만, 지금은 전망대로 바뀌어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오르자 보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근데 확실히 보훔이 다른 도시랑 좀 느낌이 다르지? 다른 도시들보다 색도 적고 화려한 건물도 거의 안보이네."
탄광의 심장이었던 보훔은 거칠고 투박했다. 한때 노동자의 도시로 불리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시 1층 전시관으로 내려와 우리는 한국인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약8,000명의 우리나라 광부들은 탄광이 밀집한 루르 산업지대로 파견됐었다. 그중 일부는 이곳 보훔에서도 일을 했다. 혹시 이 도시의 탄광에도 한국인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독일 탄광에서 일한 이주민'이라는 코너 앞에 멈췄다.
하나하나 눈으로 짚어가며 살펴보던 중, 보훔에서 일하던 한국인 광부 선생님의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아이는 그 영상을 보고, 또 보고, 한참을 눈을 뗴지 못했다. 우리나라 광부들은 유럽의 석탄 산업이 내리막길에 접어들 때까지 땅을 파고, 또 팠을 것이다. 인생의 빛이 가장 찬란한 시절을 뚝 떼어내어, 가족의 안녕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멀고 먼 독일로 이주를 결심한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서둘러 가자! 이번 기차 놓치면 돌아가는 게 좀 번거로워져."
보훔 기차역에 도착해, 삶은 감자와 치즈를 넣고 길게 돌돌 말아 튀긴 튀르키예 음식 뵤렉을 샀다. 이주민이 많은 나라답게 이주민들의 음식이 어디에서든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아이는 피곤했는지 기차에 타자마자 내 다리를 베개 삼아 잠이 들어버렸다.
어제는 오늘의 독일 이주민을 만났고, 오늘은 어제의 독일 이주민을 만났다. 독일은 오랜 시간을 들여, 꾸준히 이주민과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왔다. 오늘날 우리 땅에도 수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와 살아가고 있다. 낯선 땅에서 발을 딛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우리 모두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서울에서도 이주민들과 함께 식탁을 마주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볼 수는 없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낯선 사람과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날선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