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독일 마트

독일

by 윤예림

"이게 다 쓰레기야?"


독일 동생 집에 들어서자마자, 테이블 아래에 쌓여 있는 유리병들과 플라스틱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 이게 돈이 되거든. 독일 사람들은 쓰레기를 함부로 안 버려. 여행 끝날 때까지 잘 모았다가, 가기 전날 마트에 가서 돈으로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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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맥주나 소주를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그 병들을 들고 동네 구멍 가게에 가서 50원을 받았다. 그 돈을 모아 새콤달콤이나 짝꿍을 사 먹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병을 들고 가게를 찾지 않는다. 먹고 남은 병들은 재활용 통에 던져졌고, 사람들은 쓰레기가 자원이 된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주말이면 쓰레기를 돈으로 바꾸려는 사람들로 마트가 북적인다고 했다. 병이나 캔을 돌려주면 제품을 구매할 때 함께 지불했던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일은 함부로 버려지는 쓰레기를 다시 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독일의 마트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여행하는 내내 우리는 이틀에 한 번꼴로 마트에 갔다. 독일 여행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였다.


독일 마트는 환상적이었다. 그러니까 쓰레기를 다시 모아 자원으로 만드는 일의 심장이라는 것도 멋있었지만, 독일 사람들이 지향하는 다양한 가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나는 매대에 진열된 야채를 볼 때마다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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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바쁘게 돌아가던 유럽의 마트들(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에서 촬영)


"이 구역이 전부 감자라고? 어마어마 하다 정말."


색깔도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감자들이었다. 종류만 해도 여덟 가지가 넘었다. 동생 말에 따르면 어떤 감자는 삶기에 좋고, 어떤 감자는 튀김용으로, 또 어떤 감자는 으깨서 메쉬 포테이토를 만들 때 제격이라고 했다. 보라색 감자도 있었는데 주로 오븐 요리에 사용된다고 했다. 그 옆에 있던 토마토 라인업도 세상 다채로웠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토마토는 방울토마토와 주먹만 한 찰토마토 정도였는데, 독일 사람들은 이렇게 다양한 농작물들을 평생 먹으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부러워졌다. 왜 우리는 평생 한두 가지 감자와 오이, 그리고 몇 종류의 토마토로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야채 코너를 지나자 이번에는 어마어마한 종류의 치즈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독일 곳곳의 농장에서 가져온 치즈는 물론, 유럽 각지에서 이름난 치즈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햄버거에 들어가는 사각형의 노란 체다 치즈와 피자 위에 뿌려진 모짜렐라 치즈만 먹고 살아온 나에게는 천국처럼 느껴졌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와 아이를 보며 동생은 흐뭇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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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나던 유럽의 치즈들(독일, 프랑스)


그 옆에는 계란을 위한 코너가 따로 있었다. 20가지가 넘는 제품이 진열돼 있었는데, 종류가 놀라울 만큼 세세하게 나뉘어 있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계란 껍데기에는 생산 정보가 표시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0-DE-1234567이라고 적힌 계란이 있다면, ‘0’은 유기농 사육(닭이 유기농 사료를 먹으며 밖에서 자유롭게 지내는 환경), ‘DE’는 독일에서 생산된 것을 뜻하고, 마지막 숫자들은 생산 농장의 코드를 의미한다. 인상적인 건 많은 계란들이 앞자리에 0(유기농), 1(방목), 2(실내 자유사육) 표시를 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케이지 사육(A4 용지보다 좁은 공간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방식 '번호 4')은 독일에서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독일 소비자들은 가격 못지않게 동물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유기농 계란에는 ‘bio’ 인증 마크가 크게 붙어 있었고, 매대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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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코너를 지나고도 놀라움은 계속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찾을 수 있는 비건 제품은 종류별로 찾을 수 있었고, 무슬림 이주민들이 안심하고 식재료를 고를 수 있는 할랄 코너도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일의 마트는 그 자체로 독일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을 담은 작은 사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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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되면 우리는 동네에 서는 시장을 찾았다. 마트 만큼이나 시장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였다. 시장은 아침부터 한 주 동안 먹을 식재료들을 구매하려는 동네 주민들로 북적였다. 어른들은 물론, 동네 아이들도 다 몰려 나온 것만 같았다. 동생 말로는 이 시장에서는 도시 근교의 농장에서 직접 키운 채소나 반찬, 고기와 생선을 가져와 판다고 했다. 이날 우리는 튀르키예 이주민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통통한 올리브 반찬을 두 종류를 구매하고, 계란과 야채들을 구매했다. 비닐봉투를 내주는 판매자는 없었다. 종이 봉투에 물건을 담아 건네주었고, 주민들은 각자 가져온 천 가방에 장본 물건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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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동네에서 열리는 어느 시장을 가도 꽃 트럭이 있다는 점이었다. 동네에 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꽃 트럭이 등장했고, 그 수는 야채 가게만큼이나 많았다.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은 채소나 반찬뿐 아니라 꽃도 함께 샀다. 가만히 서서 사람들을 지켜보니, 독일 사람들에게 꽃은 빵이나 물처럼 일상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아헨의 집들은 작은 창문 앞에도 늘 꽃이 놓여 있었다. 코로나로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아야 했던 상황에서도 꽃집은 예외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는 꽃집은 서점과 함께 끝까지 문을 열고 있었다. 최소한의 것만 남은 팬데믹 속에서도, 사람들은 꽃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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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오기 이틀 전, 우리는 커다란 봉투에 가득 찬 빈병들을 들고 마트로 향했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착실히 모은 쓰레기의 마지막 여정을 확인하는 날이라 아이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마트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재활용 반납기 'Leergutautomat' 앞에는 한 팀만 서 있었다. 우리의 순서가 되자, 동생은 바코드가 보이는 곳으로 병을 하나씩 올려두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병을 기계에 넣자 ‘딸각’ 소리를 내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병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아이는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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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들을 기계 안에 넣고 나자, 재활용으로 모인 금액이 찍힌 종이가 출력됐다. 우리는 마트에서 과자를 고르고, 그만큼의 금액을 덜 지불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아이가 말했다.


"엄마, 우리나라에도 이런 기계가 생기면 정말 좋겠다. 그러면 나는 매일 빈병을 들고 와서 재활용할 거야."


한국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준비한 '친환경 마켓'에 다녀왔다. 친환경을 대표 키워드로 내세운 보기 드문 행사라 기대가 꽤 컸다. 나는 다회용 장바구니와 식기, 텀블러를 챙겨 들고 신나게 장터를 찾았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다양한 종류의 귀여운 야채들이었다. 마트에서는 늘 익숙한 채소들만 보게 되는데, 이번 장터에는 처음 보는 야채들이 가득했다. 우리나라에도 농작물의 다양성을 늘리기 위해 애쓰는 농부들의 노력이 느껴졌다. 직접 재배한 재료로 만든 반찬들도 맛이 좋았고, 비건 재료로만 음식을 만드는 시도들도 분명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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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생각보다 ‘친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켓에 참여한 브랜드 절반 이상이 여전히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제품을 팔아야 하는 업체들의 입장도 이해는 됐지만, ‘친환경 마켓’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했다. 아마 독일의 시장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일까, 그 아쉬움이 더 길게 남았다.


독일의 마트와 시장은 마치 우리의 미래를 미리 엿보는 창 같았다. 쓰레기가 다시 자원이 되고, 소비가 곧 가치가 되는 삶, 다양성과 지속가능성이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습관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모습이 참 좋았다. 나는 마트와 시장에서 시간을 돌아 보며, 마치 시간을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우리 사회에서도 우리가 먹고, 쓰고, 버리는 모든 것이 지속가능해져서 굳이 이 단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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