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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벨러 Feb 20. 2024

택배기사의 직업병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과 그에 따른 직업병이 있다. 나는 택배기사의 직업병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나에게 가끔씩 매일 계단을 뛰어다니니까 계단을 보면 오르고 싶냐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 오히려 계단을 기피한다. 나의 동료들 중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는 마치 한 맺힌 사람처럼 2층이라도 엘리베이터를 꼬박꼬박 이용한다.


배송업을 시작했을 때 느끼는 첫 증상은 바로 꿈이다. 꿈에서도 배송을 한다.

아마도 일하는 동안 실수할까 봐 집중을 엄청나게 한 탓인 듯한데 정말 끔찍하다.

온종일 배송을 하고 와서 꿈에서도 배송이라니..

참고로 이 꿈은 끝나지를 않는다. 아무리 뛰어다녀도 차에서 물건을 아무리 빼도 도무지 일이 줄지를 않는다. 그렇게 눈을 뜨기 직전까지 뛰어다니다가 잠에서 깨면 이렇게 생각한다.


"어? 아직 많이 남았는데 왜 누워있지?"


급하게 어플을 켜본 후에야 꿈이었음을 알아챈다. 나는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임에도 배송하는 꿈은 자주 꾸었다. 일에 완전히 적응해 버린 요즘도 가끔씩 꿈에서 배송을 한다. 밤이 새도록. 



또 다른 증상은 어플에 지도기능이 없는 택배에서 일할 때 겪는 것이다. 택배는 고객의 집을 찾을 때 건물에 부착되어 있는 도로명주소판을 확인한다. 

숫자 하나라도 틀리면 오배송이 되어버리기에 항상 눈을 부릅뜨고 확인한다. 그래서인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에 주인공의 집이 나오면 도로명주소판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다. 


그 파랗고 손바닥만 한 판때기가 도대체 뭐라고 수지, 아이유보다 먼저보이는 건가 싶다. 그리고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를 읽어낸 다음 핸드폰으로 검색까지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고 나면 내 집중력도 함께 풀려있다. 혹시 궁금할까 봐 알려주는데 영상에 나오는 대부분의 주소는 가짜다.



마지막 증상은 나만 겪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제 나는 집을 평가하는 기준이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나에게 집이 몇 평인지 얼마짜리 인지 뷰는 어떤지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골목이 좁지는 않은지, 아파트라면 탑차가 출입 가능한지 이다. 그래서 친구네 집들이를 가서 배송하기 좋은 곳이다 싶으면  


"너 좋은 곳으로 이사했구나?"


하고 칭찬한다. 그리고 계단형 빌라의 고층에 사는 친구들에게는 물이나 쌀같이 무거운 것들은 택배 말고 직접 들고 올라가라고 한다. 친구 앞에서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네가 기사님들한테 욕먹는 것이 싫어서라고 했지만 사실 내 고통을 너도 한번 겪어봤으면 하는 심보에서였다. 미안하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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