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고독
와이프는 내 충고는 듣지도 않은 모양이었던지, 요령 좋게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냉큼 얻어 냈다. 아무리 집 앞이라고 하지만 출근 시간이 빨라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 없곤 했다. 퇴근 후 저녁 식사 자리에 그날 편의점에 있었던 일들을 줄줄 읊으며 조잘거리는 것이 내 눈치나 보며 시무룩하던 때완 사뭇 달라 좋아 보였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게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나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아 보겠다고 하는데 말릴 수야 없지 않나. 출근길 그 편의점 앞을 차로 지날 때면 와이프는 계산대에 서서 담배를 정리하든가 이른 아침에 누군가 벌써 뭘 먹었는지 창가에 붙어 있는 테이블을 닦고 있거나 했다. 뭔가 내가 몹쓸 놈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집에 취미 생활이나 하도록 지원하고 가끔 쇼핑하라고 용돈도 줄 만큼의 벌이와 능력이 안 되는 무능감. 와이프도 사무실에 나름 중요 사안을 의사결정하고 지시하고 했던 지위를 가졌던 사람인데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며 쉽사리 그들의 감정에 노출되어 면박을 당하거나 하대 받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와 연민. 무엇하나 나를 편하게 해주는 감정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해야 하고 크던 작던 그 돈을 기반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와이프의 아르바이트는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마냥 나를 불안하게 하고 신경 쓰이게 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이럴 때 애 하나 갖는 거 어때?"
김 과장은 난데없이 애를 권한다. 애를 키우는 것이 나에게는 어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한 소리 일 것이다. 감당할 자신도 없고 책임지고 싶지도 않고 희생하고 싶지도 않다. 남들은 쉽게_모르지만 쉬워 보이는_하는 결혼도 나에게는 너무 비장했던 일이었다. 내 진영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은 소위 말하는 사랑 이상의 계산이 있었다. 이 사람은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인 말로 설득이 가능하며, 극단에 이르러도 내가 견딜 수 있음을 확신해서 한 결혼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내 생각대로 흘러왔던 결혼 생활이었다. 차라리 변수는 나였다. 빚을 지게 된 과정도 와이프의 경제력이라는 비빌 언덕을 있음을 무의식 중에 계산했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와이프에 많은 면을 의탁하게 되었다. 내가 최초에 꿈꾸던 이상적인 부부상은 이미 훼손되었다.
거기에다 애까지 갖춘다면 아마 길을 잃을 것이다. 남편으로서의 역할도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아버지까지 된다면 아이를 키워 내는 절반이상의 세월을 '무엇을' '어떻게'로 헤매게 될 것이 뻔했다. 또는 그 아이가 포주가 되어 경제적으로 독립을 할 때까지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큰 공포이다.
누군가에게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 내겐 왜 이렇게 크고 무겁고 무서운지... 와이프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픈 것일까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평생 이렇게 살고 싶은 마음과 하나씩 변화를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충돌하며 심연을 알 수 없는 블랙홀이 되었다.
"자기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계속할 생각이야?"
답답한 마음에 뭘 할 생각이냐고 와이프에게 물었다.
"응 일단은"
그럼 다음은? 다음은 차차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여하튼 지금까지 해왔던 일로 먹고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 와이프의 말이다. 또다시 마음이 불편해 오기 시작했다. 나의 무능과 앞으로 와이프 사회적 지위와 물리적 돈의 규모 대한 불확실성.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려는 와이프가 앞으로 겪어 될 시행착오와 고통, 안정적이고 영원할 것 같던 수입의 변화가 향후 우리 생활 수준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예측치, 늘 손안에 잡히던 와이프의 선택과 방향이 갑자기 알 수 없게 되고.... 또다시 심연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면서 배울 것도 알아보고 여러 가지 해볼 생각이야 여차 하면 물류 센터 가서 상하차라도 하지 뭐 "
아. 나는 고개를 떨구고 무력감이 넘실대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결국 와이프를 저렇게 내몰지 않았을까. 내가 아이를 갖게 되면 이러지 않을까 했던 일. 나는 결국 와이프의 포주가 되어 무슨 일이든 하라고 등 떠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착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