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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Feb 27. 2024

딸내미 칭찬 도장과 고흐의 푸념

오늘도 의문의 1패를 당한 아빠의 한숨

"아빠가 매일매일 숙제 잘하면, 칭찬 도장을 찍어 줄 거야."
"그걸로 뭐 하는 건데?"
"칭찬 도장 20개를 모으면 아빠가 선물을 사줄게."
"예~이~ 아빠 최고!"
-24년 2월 초의 어느 날


6살 딸아이를 교육시킨다는 것은 만년 과장이 경력직 팀원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승진을 위한 경쟁심이 있는 것도, 편안한 인생을 위한 금전욕이 있는 것도,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6살 아이에게는 이 나이에 어울리는 선물이라는 강력한 동기부여의 원천이 있지만, 자꾸 선물공세를 펼치다 보면 매일매일 공부라는 전투는 승리할지 몰라도, 몇 년 뒤에는 가정경제 붕괴라는 패전을 면치 못한다. 모름지기 훌륭한 장수라면 전투는 패하더라도 전쟁은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쓸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훌륭한 장수라 자부하므로, 아이의 공부를 위해 칭찬 도장 제도를 도입했다. 매일매일의 공부에 대한 보상은 예쁜 도장으로 대신하되, 그 공부한 것이 쌓이면 큰 선물로 보장하는 적립식 선물증정제도를 도입한 것이다.(원금보장도 보장되고, 적립도 자율적이니 최고의 금융상품 아니겠는가?) 아이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한 나로서는 칭찬 도장이 아이를 '일단 가만히 앉아 있게' 한다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24.02.27. 기준 칭찬 도장 확인표. 보시는 바와 같다. 시작한 날이 11일인데, 첫째 주만 잘했다. 첫째 주만!


설계는 완벽했다. 습관에 관련된 책을 읽다 보니 습관에 걸리는 최소한의 기간이 한 달이라 했다. 그러니 한 달만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면 아이가 스스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달 내내 공부를 하는 것은 어려울 테니 칭찬 도장의 선물은 20일만 채우면 준다고 했다.


왜 20일인가? 직장인은 매월 평균적으로 22일을 일한다. [주 5일 X 4.345주(월평균주수)=21.7일] 우리 아이도 직장인처럼 주말에는 놀아야 하니 직장인 한 달 일하는 날짜와 비슷한 20일은 아주 합리적인 기간이었다. 20일을 충분히 아이가 버텨내고, 5만 원짜리 선물로 아이의 학습 습관을 정착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싸게 먹히는 계획인가? 나는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모든 일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아이가 칭찬도장을 받기 시작한 지 7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칭찬 도장이 효력이 떨어져 버렸다. 아이가 칭찬 도장을 받지 않고도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것도 확실한 확률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말이다.


"자 이제 공부하자. 칭찬 도장으로 선물 받아야지~"
"아~ 아빠 그거 안 해도 돼. 내 생일이 얼마 안 남았잖아?"

 



무엇이든지 꾸준하게 열심히 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작업이다. 일이 어렵고 어렵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 일이 반복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 매일매일 인형 눈알을 붙이는 작업이나, 매일매일 어려운 논문을 쓰는 작업이나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힘든 정도의 차이는 미비할 것이다. 그냥 일을 반복적으로 해야 하다 보니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 받았던 형벌, 돌을 굴려 산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돌이 굴러 떨어지고, 다시 정상에 올리면 또 떨어지는 영원한 형벌처럼 힘들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은 성취의 근본이다. 힘들지만 계속하면 큰 성취를 이룬다. 미술사에 큰 획을 남긴 거장 '빈센트 반 고흐'를 아는가? 우리에게 자화상으로 유명한 이 화가는 평생 동안 그림으로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거장이다. 살아생전 그의 그림이 팔린 것은 딱 1편뿐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고흐의 인생이 고단했을 것인가. 고흐의 일상은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삼류화가로 조롱받으며, 동생에게 의지해 근근이 삶을 연명하던 불쌍한 인생 그 자체였다.

자화상, 별이 빛나는 밤에, 해바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예술적 의지는 대단했던 것 같다. 동생 테오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는데, 테오에게 쓴 편지 내용 중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해져 온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글 中


그의 화풍은 강렬한 색채와 감정적 표현, 그리고 독특한 화면 구성을 통해 표현주의적이며 독창적이라고 평가된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내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그의 작품들은 자아를 발견하고 내적 고뇌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생전에 고흐가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한 화가였다는 점과 더불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비극적인 삶은 그의 작품들과 어우러져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과연 고흐처럼 불후하게 살면서, 끝까지 자기가 하는 일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연마하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위대한 사상가, 예술가, 과학자들은 대부분 지루한 반복을 참아가며, 자신의 일을 꾸준히 했던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반복이 인생의 성취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깨닫게 된다.


나도 요즘 열심히 칭찬 도장을 받기 위해 반복된 일들을 하고 있다.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독서집중'기간을 내게 부여해서 지금까지 밀린 독서를 채워나가고 있다. 하루하루 반복된 작업들은 쉽지 않다. 매일 1권의 책을 읽어야 하고, 매일 글을 써야 한다. 세세하게는 좋은 글감을 찾기 위해 매일 아침마다 필사를 해야 하고, 어려운 책 1권을 10회독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과욕 같지만 글을 잘 쓰기 위한 문법공부도 다시 하고 있다. 나에게도 매일 반복해서 해야 할 일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것이다.


  

괜한 관을 건드려서 '겁나 험한 것'이 나왔다는 최근영화 '파묘'의 대사가 생각난다.



내가 딸내미에게 칭찬 도장을 찍어준 것처럼 나는 칭찬 도장을 매일 받을 만큼 잘하고 있는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매일 책 1권 읽기는 어느새 읽었던 책을 재탕하는 식이 되어버렸고, 1주간 2회독을 했어야 하는 어려운 책을 1회독도 못했다. 과욕이었던 문법공부를 위해 샀던 이오덕 선생의 '우리말 바로 쓰기'는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권의 반도 못 읽었다. 매일 글쓰기는 꾸역꾸역 하고 있지만 글의 질적인 부분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하다. 모든 것이 부족한 것들 투성이다.


딸내미의 칭찬 도장과 빈센트 반고흐의 편지는 힘들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알려준다. 선물을 받으려면 매일매일 꾸준히 숙제를 해서 칭찬 도장을 모아야 한다. 위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변덕스러운 감정을 다잡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 고흐의 말처럼 그림이 쉬웠다면, 그림이 재미가 있겠는가? 성취가 쉽다면 성취의 결과가 그렇게 뿌듯하지는 않을 것이다.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하루 이틀 고된 반복을 하다 보면, 어느새 멋들어진 책상이 만들어져 있고, 자기 글을 몇 백번이상 퇴고한 허밍웨이같이 하다 보면 '노인과 바다' 같은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칭찬 도장의 쓸모를 잊어버린 딸내미에게 다시 공부를 권유하기 어려운 까닭은, 나조차도 매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고, 성실함과 나태함을 반복했다던 고흐의 고백처럼 나도 반복이 주는 형벌의 고통을 견뎌내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 내게 선물의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겠나? 언제인지 모를 그날을 위해, 나의 칭찬 도장도 소복이 쌓여가길 조심스럽게 기대하며 딸에게 고백한다.


"딸아 아빠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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