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CJ 식품부문 담당자가 생각하는 주관적인 직무소개 2탄
오늘은 제가 경험한 두 번째 직무 전략기획 직무에 주관적인 생각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전략기획팀에는 신입은 거의 없고 다양한 부서에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차출되는 편이고, 늘 미팅과 보고서에 쩌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결정권이 있는 C레벨들과 가장 가까이서 소통하고 일하고 있음으로, 회사 방향성을 잡는 가장 중요한 핵심 부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가 정의해 본 전략기획은 '여러 진주들을 잘 모아서 가장 상품성이 있는 진주목걸이를 꿰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 실행부서에서는 다들 그럴듯한 진주들을 서로 뽐내고 있지만, 이것들을 큰 관점에서 모아보면 가치가 있는 목걸이가 짠 하고 나오지는 않습니다. 전략기획팀은 실행부서에서 진행하는 중요 프로젝트를 다 듣고, 취합하고 가다듬고 외부 Insight도 얻어 중기/장기 관점에 사업모델을 제시합니다. 수백, 수천 가지 진주알들을 모아 하나의 진주목걸이(보고서)로 제시하고, 최고경영진들이 옳은 결정을 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도움만 안되고 허무맹랭한 궤변만 늘여놓는 게 전략팀이라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시죠? 저 역시도 실행부서가 기피하는 담당자였습니다. 직접 실무를 하지 않다 보니 모르는 것 투성이니, 늘 쓸데없는 취합과 미팅만 요청하였고, 현업 입장에서는 보고서에 한 줄이라도 팀 내용이 들어가면 귀찮은 일들만 가득 안기니까요.. 뇌절기획자가 되고 싶지 않았고, 가설을 세운 것들이 구체화되어 실행됐으면 싶었지만 잦은 조직개편이라는 핑계로 A라는 전략은 B로 바뀌었다가 또다시 A로 바뀌는 일도 너무 흔했습니다.
그래도 늘 전략기획 부서는 어디든 존재하고, 핵심 인재로 구성됩니다. 중국에는 명마를 알아보는 백락(伯乐)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백락은 말을 알아보는 뛰어난 사람으로, 천리를 달리는 말을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수천억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각 현업부서에는 고작 수십억이라는 목표로 한계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략기획은 평범한 말들 사이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천리마들을 구분합니다. 천리마는 한 번 먹을 때 곡식 한 섬을 먹어야 비로소 천리를 달릴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업 가능성이 있는 일들을 찾아 정리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중기/장기 관점에 회사가 옳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끔 주도합니다.
저는 회사 핵심 7대 제품 중 쌀가공 카테고리 전략기획 + 마케팅기획을 담당했습니다. 주로 본사 자원을 어떻게 글로벌 법인(Region)에 효율적으로 배분할지, 중장기 관점으로 어떻게 포트폴리오를 재편할지, 보고서는 어떻게 써서 의사결정을 받을지에 대한 일들을 했습니다. 미팅은 수시로 있었고, 경영진 보고 일정은 이미 년간 계획이 꽉 차있는 터프한 환경에서, 경험적은 대리 2년 차가 각 팀장/임원급을 상대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죠. 그래도 저는 이 부서에서 제 연차에 배우기 힘든 경험을 하며 성장했습니다. 사업을 절대 스스로 제한하지 않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업기획을 하고, 부서들을 잘 설득하여 일을 추진시키는 역량을 키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전략기획은 어떤 역량이 필요할까요?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아래와 같이 추려봤습니다.
1. 보고서 속독 및 인사이트 도출
저는 본사와 각 글로벌 법인들 + 에이전시와 늘 소통해야 했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늘 미팅만 하고, 제 업무는 퇴근 이후에 했습니다.. 미팅 전 읽어야 하는 보고서들은 이미 제 capa를 초과한 상태였지만, 저희 담당님은 보고서를 15분 정도 훑어보고 미팅을 리드하고, 인사이트를 뽑아 챌린지도 하는 걸 보고 마냥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본 제가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꼽는 게 보고서를 속독하고 인사이트를 뽑아내는 능력입니다.
2. 보고서 작성 및 스피치
전략기획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지만, 일을 직접 실행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간결한 보고서로 C레벨에게 보고하여 의사결정을 받아야 합니다. 임원들은 빼곡한 자료를 원하지 않습니다. 상세 내용은 프리뷰로 사전 공유하거나, 어펜딕스로 빼고 결국 A4 한 장으로 모든 사업안을 명확하게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단어 하나와 문장이 매우 중요하고, 이 작업에 정말 몇 날 며칠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챌린지를 덜 받게끔 하는 스피치도 중요하고, 챌린지에 즉각 대응하는 능력도 발휘해야 합니다. (왜 학창 시절 요약하는 능력이 중요한지 이 때 깨달았죠..)
3. 커뮤니케이션 능력
결국 일을 하는 건 현업부서라는 생각을 늘 했기에, 이들을 설득하여 보고서 한 줄 한 줄 채우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탑다운 방식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몰래라도 실행부서에게 보고서를 공유하여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15분씩은 법인(한국,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베트남) 담당자와 회의를 진행하였습니다.(소모적인 시간 너무 쓰지 말라고 챌린지도 많이 받았지만 늘 제가 고집한 게 바로 요 미팅입니다~아젠다가 없는 날은 팀빌드 느낌으로 사담을 주고받았고요)
결국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하기에 서로 Align된 생각이 꼭 필요로 합니다. 이견이 있을 때는 린한 A/B 테스트 결과를 통해 조율을 하였고, 최종 보고 전 모든 VC들을 모아놓고 최종컨펌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가장 Align된 사업 방향성을 갖고 빠르게 원팀으로 일을 추진한 게 쌀가공 카테고리였습니다.
말은 위와 같이 써놔도 늘 욕을 먹는 게 전략기획 부서인 듯합니다. 늘 메일과 전화는 다 씹히고, 보고 일정은 빼곡한 상황에서 항상 갑으로 보이지만 결국 을에 위치에 있습니다. 가끔은 의사결정을 통해 실행된 전략이, 조직장 변경으로 무산되는 상황이 생기면 허탈함과 현타도 많이 느끼고요. 그래도 큰 관점에서 사업을 내다보고, 모든 중요 미팅에 참석하여 경영진 경험과 생각들을 귀동냥하는 건 제 대리 2년 차에서 엄청 운이 좋았던 경험이고, 정말 많은 성장을 했던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