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생이 4명이다. 그중, 암스테르담 여행에서 언급했던 막내 동생에 관한 얘기를 해 볼까 한다.
막내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태어났다.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둔 엄마가 아들을 하나 더 낳아야 한다는 집착으로 마흔이 넘어 낳은 아이였다. 결국 딸이 태어났고 막내가 태어나던 새벽에 딸을 낳고 엄마는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그 시대에는 그랬었다
당시 중2사춘기였던 나는 엄마가 애를 낳았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같은 반에 나랑 비슷한 상황의 아이가 있었는데 둘이 몰래 속닥거리면서 우리 동생이 이가 났어, 옹알이를 해, 등등의 이야기를 하며 친하게 지낸 기억이 있다.
막내는 크면서 점점 못생겨졌고 성격도 거칠었다. 그때부터 집안이 어려워져 엄마가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린 동생이 혼자 집에 지내는 일이 많았다.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늘 꾀죄죄한 모습으로 악바리가 되어 갔다. 엄마에 대한 분리불안이 커서 그런지 떼어놓고 어딘가 갈 때는 집안이 전쟁터가 되곤 했다. 잠시 방심한 사이 엄마가 사라지면 집에서 뛰쳐나가 거리에서 드러누워 목놓아 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며 묻는 게 창피해서 난 울고 있는 막내 근처에서 숨어 지켜봤다. 속수무책이었다. 한 시간 정도 울다가 진이 빠지면 더러워진 동생을 데리고 집에 데려오곤 했다.
조금 크면서는 어디든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껌딱지처럼 따라다녔다. 가끔 건망증이 있는 엄마가 애를 두고 혼자 집에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어떻게 해서든지 집을 찾아오곤 했다. 정말 씩씩하고 강한 아이였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어서 성적이 좋지 않아서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뭐라도 가르쳐 보려고 했으나 포기했다. 맘에 안들면 소리 지르며 우는 통에 질려서 할 수가 없었다. 막내와 나의 나이차는 의외로 커서 내가 부스스한 차림으로 애를 데리고 슈퍼에 갔다가 막내의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어머니냐고 물었던 적도 있다. 극강 동안을 자랑하던 나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씩씩하게 자라던 막내는 3수를 해서 디자인 관련 대학을 갔고, 회사에 다니다가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남자를 만났다. 산적 같은 외모를 지녔지만 막내를 무척 사랑하고 살뜰한 남자였다. 어느 날 작은 프랜차이즈 카페를 개업해서 3년 정도 했는데 셋째 아이를 낳으면서 그만두었다. 같이 살면서 아이들을 돌봐주던 시어머니께서 분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넷째 아이를 낳았다. 우린 좀 어이없어했으나 막내가 낳은 막내라고 하면서 귀여워해 주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다섯째가 생긴 것이다.
10년 동안 다섯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씩씩하게 살아가던 막내는 어느 날 이민을 선언했다. 그것도 유럽으로.
정말 알 수 없는 아이다. 코로나 시기에 배낭 하나씩을 매고 떠난 조카들은 이제는 잘 지내고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떠난 아이들은 한국을 그리워하지만 어린아이들은 마냥 행복해 보인다. 떠난 지 3년 정도 지났지만 역시나 막내는 씩씩하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 내 혈육이 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유럽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매사에 두려움만 가득한 나에 비해 도전적이고 겁을 내지 않는 막내가 대견하고 부럽다. 어린 자식 다섯을 데리고 이민을 결심한 결단력도 놀랍고, 앞으로 막내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가 되기도 한다.
나는 큰언니지만 늘 집을 떠나서 같이 지내기 못했고 살가운 편도 아니어서 막내는 약간 나를 어려워한다. 그래서인지 나한테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한다. 내가 보는 모습이 다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한다.
막내가 떠난 한국은 쓸쓸하다. 형제자매가 가까이에서 같이 늙어가면 좋을 텐데. 어릴 때는 책임감으로 버거웠지만 이제는 많은 동생들을 만들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