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오락을 대하는 그들의 자세
내 오른쪽에는 아빠와 어린 아들이 앉았다. 두 사람은 아빠와 아들이라기보다는 축구팬으로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빠가 아들에게 일방적으로 축구 경기를 설명하거나 우쭈쭈하는 마음으로 아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진지하게 의견을 묻고 답하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아빠가 어떤 선수의 움직임에 대해 아들의 의견을 물어보면 아들은 자신만의 축구철학을 바탕으로 나름의 분석을 한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자주 경기를 보면서 자신만의 데이터를 쌓기 때문에 축구를 보는 마인드와 시각이 다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토트넘이라는 클럽에 대한 애정도 어느새 무한히 깊어지겠지. 뿐만 아니라, 함께 축구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이 먼 훗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아빠와 나만의 ‘무엇’ 같은 거. 행여 사이가 서먹해지더라도 이때의 기억은 마음 한 켠에 있을 것이고, 휴대전화 너머로 어색함이 흐를 때에도 지난밤 경기를 핑계 삼아 간단히 안부를 묻고 전화를 끊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왼쪽에는 세 명의 아저씨 친구가 맥주컵을 들고 앉았다. 이들이 경기를 즐기는 모습을 보니 역시 축구선수는 이들에게 최고의 연예인이고, 축구 경기야말로 최고의 안주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나이스한 성격으로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도 축구장에 들어서면 다 망나니가 된다고 하지 않나. 하하. 그 말을 몸소 체험했다. '돈도 엄청 많이 받는데 우리가 이 정도 바라는 건 당연하지. 프리미어리그라는 무대에서 뛰고 싶으면, 그 주급을 받고 싶으면 그에 걸맞은 결과를 내야지.' 이런 마인드가 축구장 한가득 들어차있다. 그래서 마구 박수를 쳐주기도 하고, 마구 욕을 하기도 한다. 조금만 놓쳐도 거침없이 욕을 쏟아낸다. 선수들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비판(혹은 비난)하고, 그러다가 맨시티 팬들을 향해 욕도 하다가, 응원가도 불렀다가, 맥주도 마시다가, 격하게 분석하고 친구랑 토론하다가, 또 화를 내다가 웃다가.. 이걸 계속 반복한다. 내 앞자리 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정신 빠지게 신나는 오락이라니. 이 세상에 내가 가진 거라고는 이 경기밖에 없는 듯 온 힘을 다해 푹 빠지는 사람들, 참 재밌는 풍경이다.
이쯤에서 손흥민 선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모든 프리미어리그 팬들이 좋아하는 선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탁월한 실력과 인성과 인기에 대한 영상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직접 가서 보니 손흥민 선수도 극한직업인 프리미어리그 선수 중 하나임을 실감했다. 한국에서 보는 글과 영상에는 영국팬들이 항상 그를 칭찬하고, 경기에서 지더라도 그의 플레이만은 인정해 준다는 내용이 많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 주변에는 그의 나이와 부진에 대해 신랄하다 못해 과격하게 평가하는 팬들이 많았다. 이러다가 한 골 넣으면 바로 '아이 러브 쏘니'라고 할 게 분명하다. 그런 속성을 가진 직업이라는 것이 피부로 확 와닿았다. 어떤 비난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것이어서 속상했지만, 어떤 비판은 새로운 시각이기도 했다. 여러 수준의 의견, 분석, 비판, 비난이 정신없이 공존하는 곳. 프리미어리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깊고 진한 정글이자 놀이터였다.
이번 경기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토트넘과 아스널과 맨시티의 이익이 뒤엉킨 경기. 한마디로 꿀잼 경기다. 토트넘과 아스널 팬들은 서로 경멸하는 사이다. 아스널과 맨시티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1위 경쟁을 하고 있다. 여기서 각 팬들의 입장은 이러하다.
- 맨시티: 토트넘 이기면 1위 확정.
- 토트넘: 승점이 절실한 상황. 근데 우리가 이기면 아스널이 1등 하는 게 너무너무 싫음.
- 아스널: 토트넘의 승리는 싫지만, 1위 하고 싶으니까 제발 토트넘이 맨시티를 이겨줬으면 함.
상황이 이러다 보니 경기 중 흥미로운 장면이 많았다. 특히 홈의 주인인 토트넘 팬들의 의견이 갈렸다. 누군가는 죽어도 아스널의 우승을 볼 수 없다며 지길 바라고, 어떤 팬들은 당연히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앉았던 좌석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오히려 맨시티 선수가 중요한 기회를 놓치면 아쉬워하고, 토트넘 선수를 향해 골을 넣지 말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사람들을 향해 제정신이냐고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감독석 뒤에서 패배를 바라다가 감독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도 있었다. 외국 리그를 보면서 가장 신기한 건 모태신앙처럼 어린 시절부터 한 클럽을 영원히 사랑하는 모습이다. 라이벌 팀을 죽어라 싫어하고, 그 팀이 우승하느니 그냥 우리 팀이 한 번 져라! 이렇게 바라는 마음은 무엇일까. 이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는지라 그런 팬들을 직접 보니 경기만큼이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마지막으로 놀라웠던 건 바로 경기 다음날이었다. 버스를 1시간 정도 탔어야 했는데 앞뒤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마다 토트넘과 맨시티 경기 얘기에 열을 올렸다. 공항에서도,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큰 소리로 영상통화를 하면서 어제 경기에 대해 한참을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와, 이렇게나 미쳐있구나. 이렇게나 진심이구나. 다음날 친구, 동료,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가 경기의 일부인 것이다. 덕분에 나도 다음날 런던을 떠날 때까지 경기에 대한 흥분감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놀이공원을 갔을 때만큼의 충격이랄까. 거대한 문화 하나를 꿀꺽 삼킨 기분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부전술부터 선수들의 화려한 개인기, 티키타카, 빠른 속도감, 유럽 축구팬들의 응원까지. 모든 것이 기대 이상이었다. 지구 끝까지 신이 난다. 아마도 난 오래도록 축구를, 프리미어리그를 볼 것 같다.
[비하인드 스토리]
+ 결과는 맨시티의 승리로 토트넘은 승점이 모자라 챔스로부터 멀어졌고, 아스널은 1위를 하지 못했다.
+ 토트넘 골대 앞에서 홀란이 개인기를 하거나 맨시티의 전매특허인 빠른 패스가 시전 되면 토트넘 팬들도 전광석화같이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더라. 하하하.
+ 토트넘 응원가.. 너무 처진다. 웬만한 건 다 외워서 같이 불렀는데 신나고 기운을 팍팍 쏘는 응원가가 필요하다. 맨시티 응원은 참 신났... 여기까지.
+ 난 요즘 프리시즌 분석 영상을 섭렵하며 다음 시즌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주부터 시작이다. 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