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시작 1시간 전
관광은 이제 그만. 늦은 밤에 이동하는 것을 피하려고 경기장 근처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중심지에서 약 1시간 떨어져 있는 토트넘으로 넘어왔다. 토트넘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전체적으로 동네에 활기가 전혀 없었다. 인적이 드물고 지저분한 길가, 깨진 유리창, 슈퍼조차 찾기 어려운 휑함이 뿜어내는 낯선 분위기에 잔뜩 쫄았던 건 사실이다. 마약에 취한 아저씨가 헤롱거리며 코앞에서 우리를 위협하기도 했다.
더 무서운 건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아스널 팬이었다. 호스트에 따르면 토트넘에는 의외로 아스널 팬이 많이 산다고 한다. 오호라..
밤샘 비행부터 2만 보가 넘는 반나절 관광까지. 숙소에 도착하니 피곤한 건지 아닌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우리는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이번 여행, 정말 분 단위로 시간을 쓰는 기분이다. 2초 같은 2시간이 지났다. 눈을 감자마자 눈을 뜨라니. 그래도 이 덕분에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하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동네 곳곳에는 토트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 1시간 전, 분위기는 그야말로 후끈하다. 푸드트럭에서 풍기는 맛있는 핫도그 냄새를 맡으며 수많은 토트넘 팬들 사이를 걷는데 갑자기 저 멀리 하늘색 옷을 입은 무리가 등장했다. 맨시티 팬들이 대거 등장하며 응원가를 떼창 하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어찌나 신이 나는지 들어가는 입구를 세 번이나 틀려서 직원들이 도와줬다.
경기 전,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구장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피지컬이 더더더 좋은 선수, 오늘따라 몸이 가벼워 보이는 선수, 오늘따라 연습 슈팅도 못 차는 선수, 그리고 이리저리 다이빙을 해보는 양 팀 골키퍼까지. 개인적으로 직관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선수들의 몸풀기부터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눈이 시리고 뻑뻑해질 때까지 한 선수라도 놓칠세라 집중을 했다.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다.
시작 바로 직전, 매점은 인산인해다. 런던의 고오급 애프터눈 티세트를 모른 척했던 우리였는데 여길 오니 일회용 컵에 따라주는 만원 넘는 맥주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맛은.. 영국이었다. 사실 맥주를 마시고 싶어서 주문했다기보다는 감자튀김을 입안 가득 넣고 맥주를 홀짝 거리며 오늘 경기에 대해 뭐라 뭐라 떠드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우리도 슬쩍 끼고 싶었던 것 같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지 않아도 되는, 큰 목소리와 침 튀기는 흥분감이 기본값이 되는 90분의 예고편과 같은 공간이었다.
이번 시즌은 프리미어리그 5위권 팀들의 경기를 거의 다 봤다. 특히 토트넘의 경기는 프리시즌부터 전부 봤는데 시즌 초반과는 다르게 정말 답답한 축구를 하고 있었다. 하프타임에 달려 나가서 캔맥주를 얼마나 사 왔는지... 매주 볼 때마다 속이 상했다(라고 쓰고 ‘화가 많이 났다’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TV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가까이에서 토트넘 선수단을 보니 갑자기 내적 친밀감과 애정이 샘솟으면서 애국가를 기다릴 뻔했다. 역시.. 자주 보면 정든다.
휘슬이 울렸다. 이제 경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