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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이불 Aug 20. 2024

해가 반짝이는 런던에서

관광을 이어갑니다.

요란한 알람소리에 깨자마자 힐끗 창문을 보니 커튼을 뚫고 해가 비치고 있었다. "됐다, 오늘." 거리에 새파란 하늘과 쨍한 햇살이 한가득이다. 어제 아침 공항에 도착해서 기차를 타고 런던 중심에 내려 버킹엄 궁전을 보고, 빅벤도 보고, 토트넘 경기도 봤다. 이 모든 것이 까마득한 과거의 일 같은데 오늘 다시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야 한다. 그러니 이제는 재빠른 관광객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나왔다. 날씨가 쨍하니 삭막했던 동네 분위기도 조금은 부드럽게 느껴진다. 토트넘, 안녕!


다시 도장 깨기를 시작해 보자.


여섯 번째 미션: 타워 브리지를 건너세요.

5년 전, 부다페스트에 있는 세체니 다리를 건넜다. 야경 명소로도 빼놓을 수 없는 이 예쁜 다리는 타워 브리지 건축가가 설계했다고 한다. 그때 얘기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런던에 가서 타워 브리지를 볼 수 있겠지? 그 '언젠가'라는 시간이 왔다.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조금은 감격스럽다. 가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서 미래의 나에게 보낸 편지를 드디어 열어보는 기분이랄까. 저기 보인다! 우와, 세체니는 귀염둥이었네? 타워 브리지는 멀리서도 이미 웅장하다. 다리가 열리는 건 보지 못했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탁 트인 풍경을 보고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일곱 번째 미션: 북적거리는 마켓을 구경하세요.

런던에는 눈과 입이 즐거운 마켓이 많다고 한다. 유명한 곳을 전부 갈 수는 없기 때문에 동선상 가장 가까운 버로우 마켓을 선택했다. 작은 마켓에 들어서니 상기된 표정으로 구경하며 걷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버스킹을 하나? 여기저기서 음악소리도 들려온다. 아기자기한 가판대와 상점에서는 피시 앤 칩스부터 블루베리 머핀까지 다양한 음식을 판매하고 있었다.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지내는 도시마다 가능하면 마켓은 다 가보는 편이다. 현대적으로 예쁘게 조성된 마켓부터 주말시장, 전통시장, 야시장까지. 알록달록 잔뜩 진열된 예쁜 혹은 신선한 물건을 바쁘게 사고파는 장면들이 몸과 마음에 활기를 확 불어넣어 준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이상하다. 이런 곳에서는 뭔가 손에 들고 먹으면서 걸어야 기분이 나는 것도 알지만.. 그럴만한 흥이 올라오지 않는다. 버로우 마켓은 잘못이 없다. 어제 관광에서도 기분이 일정 수준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지.


여덟 번째 미션: 소호를 산책하며 런던을 느껴보자.

어제는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차이나타운 방향으로 걸었고 이번에는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걸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옥스퍼드 스트리트가 유명한 쇼핑거리라는 것을 모르고 갔다. 런던의 소호가 걷기도 좋고 구경할 것도 많다던데 어제 걸어보니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있을 것 같아서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걸어봤더니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쭉쭉 뻗은 길에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골목골목 우리가 상상하던 런던식(?) 빨간 벽돌 건물을 맘껏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아름답고 큼직한 얼굴의 꽃들로 가득 찬 플라워샵도 기웃거리고, 귀여운 택시도 맘껏 보고, 영국 드라마에 자주 나오던 주택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도 남겼다. 햇살이 반짝이는 런던의 거리란! 자꾸만 밀려오는 런던에 대한 이유 모를 아쉬움이 조금은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아홉 번째 미션: 원하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다.

이제 슬슬 기차역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어제부터 계속 하이드 파크가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지난 글에도 썼듯이 난 공원을 무척 좋아한다. 어제도 공원을 두 곳이나 가놓고 정작 하이드 파크를 못 보다니. 시간이 촉박해서 다음을 기약할까 했지만, 에라 모르겠다. 그런 게 어딨어. 만나고 싶은 게 있으면 만나야지. 조금 서둘러서 하이드 파크를 가로지르기로 했다.


경보하듯 빠르게 샥샥 걸어서 공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하. 가슴이 탁 트인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큰 공원이 이렇게 푸르르게 있다는 것. 편의점, 카페, 자전거 대여소가 시야 곳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초록색 그 자체다. 너 공원 좋아한다며? 그래, 어디 공원맛 좀 봐라! 하는 것 같았다. 360도 초록초록. 파란 하늘 빼꼼, 다시 초록초록. 높은 나무, 넓은 잔디, 조깅하는 수많은 사람들, 자전거 타는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 잔디에 둥글게 모여 앉아서 기타 반주에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아장아장 비눗방울을 따라다니는 아이들. 바쁜 도심 바로 옆에 바쁨과 단절된 공원이 있으니 얼마나 숨통이 트일까. 이곳의 주말 풍경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웃음이 절로 났다. K도 이곳이 가장 좋았다는 걸 보니 우린 역시.. 공원을 참 좋아하는구나 싶다.


아쉽지만 이렇게 런던이랑 작별한다. 마지막 순간이 햇살 받은 초록색이어서 좋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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