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취향을 수집하는 일
종합선물세트 같은 1박 2일이 끝났다. 한 도시에서 한 달 이상 머무르며 느릿느릿 여행하는 우리에게 이번 여행은 짧은 낮잠에서 꾸는 꿈과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사진을 볼 때마다 아득히 먼 과거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첫 런던, 첫 프리미어리그 직관, 첫 1박 2일 타국 여행. 그러나 이렇게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가득한 여행이었음에도 가장 미스터리한 것은 바로 런던을 맞이하는 우리의 기분이었다.
K와 나는 유럽여행을 좋아한다. 유럽은 어느 도시를 가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항상 여유로움이 느껴지기 때문에 그 여유로운 분위기를 타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는 재미가 있다. 당연히 비유럽권 국가도 그만의 매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돌고 돈다. 다만, 돌고 돌다가 유럽에 도착하면 살짝 더 들뜨고, 하고 싶은 것이 1-2개 더 늘어나고, 사진을 조금 더 찍게 되고, 걷고 싶은 시간이 많아진다. 그래서 대표적인 유럽 도시인 런던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마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특히 유럽이라면 더욱더. '무려 런던이잖아. 내가 피곤해서 그래. 비 온 뒤라 우중충해서 그럴 수도 있어. 조금만 기다려봐. 런던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자꾸 내가 잘못 느끼고 있는 거라며 나 자신을 채근했다. K의 기분까지 방해할까 봐 이런 마음을 콕 집어 말하지 않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 런던을 바라보려고 했다. 관광 2일 차이자 마지막 날, 버로우 마켓에서 빠져 나와 한 카페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둘의 눈이 마주치면서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행여 상대방의 즐거운 마음을 망칠까 조심스럽게 빙빙 돌려 말하지만 결국 우린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런던... 그냥 그래." 오, 이런. 이틀 내내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부터 주변에서 런던이 최고다, 런던 진짜 좋다, 런던 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서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K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대화를 하며 이유를 찾아보려 애썼지만 이내 부질없는 짓임을 알았다. 그냥 지금 시점의 우리의 취향이 그런 것이다. 아무리 햇살이 쨍한 날씨여도, 잘 정돈된 길을 걸어도, 멋진 건축물을 봐도 어딘가 모르게 우중충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것보다 더 피곤한 상태로 새로운 도시에 도착한 적도 많고, 지린내가 나는 골목도 걸어보고, 3일 내내 비가 오는 거리를 걸은 적도 있지만 우울한 분위기를 느낀 적은 없었다. 유럽에 있으면 날씨가 어떻든, 몸 상태가 어떻든 언제나 잔잔한 설렘이 있었다. 그렇기에 런던에서 마음이 꿈적도 하질 않자 당황스러웠다. 아마 이런 이유로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공원을 조금 더 악착같이(?) 찾아다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받아들였다. 런던은 우리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그게 잘못된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런던이 못나서도, 사람들이 불친절해서도 아니다. 같은 유럽이어도, 같은 고풍스러운 건물이어도, 같은 여유로움이어도 내 눈과 마음에 맞는 곳과 아닌 곳이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걸 받아들인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나와 우리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굳이 분위기를 잡고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지 않더라도 매번 새로운 환경에 우리를 두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내가 아는 '나'는 이걸 좋아할 것 같은데, 아니었네. 내가 아는 '그'는 이런 건 싫어할 줄 알았는데, 좋아하네. 이렇게 나에 대한, 서로에 대한 취향을 모으게 된다. 하지만 이런 취향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유동적인 것임으로 현재의 내가, 현재의 그가 지금 느끼는 걸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반드시 계속 좋아해야 할 장소도, 음식도, 그림도 없다. 반드시 계속 싫어해야 할 사람도, 도시도, 문화도 없다. 런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세계를 떠돌다가 다시 런던에 갔을 때, 런던의 매력에 푹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하하.
이스탄불로 돌아갈 때도 새벽 비행이라 공항에서 한참을 대기했다. 분명 공항 검색대를 통과한 구역이었는데 술에 잔뜩 취해서 바지에 실례를 하고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아시아인에 대해 얘기하는 아저씨를 만났다. 런던은 참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는구나? 복수하는 건.. 아니지? 크크. 이른 아침 이스탄불에 도착했고, 이틀 뒤 짐을 싸서 무사히 이탈리아로 이사했다. 그렇게 극강의 스케줄은 마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