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이후 축구 이야기
이번 여행의 목적이자 하이라이트인 프리미어리그 직관. 그 강렬했던 경험으로 나는 축구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 사실 해외 리그 경기를 직관한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런던에 가서 경기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넘어서서 그곳의 거대한 축구 문화가 궁금했던 나에게는 이번 경험이 단순한 직관 이상의 의미로 기억된다. 모든 선수가 탐내는 리그의 경기는 어떨지, 그 리그의 1위를 달리는 팀은 어떤 경기를 하는지, 현대 축구에서 명장이라고 부르는 감독은 어떤 제스처를 할지, 몸싸움의 강도는 어떠한지, 어릴 때부터 한 클럽에 모든 마음을 바치는 현지 팬들은 어떻게 경기를 볼 지, 하프타임에 팬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궁금했다. 그걸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시간만큼 기대감도 커져 있었지만 실망은 커녕, 프리미어리그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중계화면 밖에서 일어나는 선수들의 움직임과 공간창출, 감독과 코치진의 몸짓, 관객석의 사소한 이야기까지 모든 장면이 내 머릿속에 슬로 모션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그 강렬한 기억이 박혀 있으니 나도 모르게 축구에 더 스며드는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축구를 좋아한다거나 축구 경기 보는 것이 취미라는 말을 잘 못했는데 이제는 그 세계의 작은 일부가 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현지 팬들을 직접 본 후로 가장 부러운 건 국내외 어느 리그든, 어느 스포츠든 한 팀에 열렬한 사람들이다. 사실 나는 뼛속 깊이 응원하는 팀이 아직 없다. 연고지로 팬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좋아하는 감독 또는 선수를 따라가다가 한 팀에 정착하는 사람도 많다는데 나에게는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감독이 떠나도, 그 선수가 떠나도 여전히 그 팀에게 푹 빠져있을 수 있을까. 나를 그 정도로 흔들어 놓은 팀은 없었다. 그래서 매일 기다린다. 훅, 내 마음에 들어오는 팀이 생기기를. 나에게도 그런 광적인 대상이 나타나기를. 하하.
이번 런던 여행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내 축구생활의 영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시즌부터 프랑스 리그앙과 스페인 라리가, 독일 분데스리가의 상위권 팀들의 경기도 보기 시작했다. 예전에 한창 보던 K리그도 다시 야금야금 찾아보는 중이다. 이제 이탈리아 세리에 A만 남았다. 나의 직업이 뭐였더라. 무엇이 직업이고, 무엇이 취미인가. 바빠 죽겠네. 주말에 데이트를 하러 나가도 축구 경기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미쳐...).
이런 '덕질'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삶에 활력을 준다는 것이다. 프리랜서여서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은데 축구 경기가 주로 주말에 몰려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말을 조금 더 특별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됐다. 주말에는 하루 최대 8시간씩 축구를 보고, 평일에는 경기 분석이나 인터뷰, 비하인드 영상을 보며 경기를 복기한다. 순간마다 어찌나 즐거운지, 참 고마운 일이다. 또 하나의 기쁨은 K와 나누는 대화 주제가 하나 더 늘었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얼굴이 새까매질 때까지 축구를 하고, 군대에서도 축구를 하고, 지성이형을 쫓아 맨유 경기를 보면서 해외 선수 및 감독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K에게 축구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다. 질문하고 답하면서 대화하고,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면서 한번 더 이야기하고, 축구 경기를 볼 때는 소파 지박령이 되어 감자칩을 나눠 먹으며 또 한 번 대화를 나눈다. 같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이 우리 관계에 색다른 활력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세계여행 중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면서 축구팬들을 보는 재미도 있다.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입은 이탈리아 소년에게 말을 걸어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축구 팬들끼리는 쉽게 대화가 되는 법이니까. 훗. 어느 나라를 가든 유니폼이 가장 많이 보이는 팀은 레알 마드리드이고, 선수로는 메시이며, 축구에 대한 사랑이 뿜어져 나오는 곳은 세르비아였다. 파리도 만만치 않았는데 특이한 점은 유니폼의 이름이 오로지 음바페라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로 이사를 앞두면 환율이나 역사를 찾아보기 전에 그 나라에서 축구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선수가 있는지, 월드컵 성적은 어떤지를 먼저 머릿속으로 정리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그 나라에 대한 내적 친밀감이 생긴다. 글로 적고 보니 점점 축구에 매료된다고 표현해야 되는지, 약간은 미쳐간다고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허허.
여름 프리시즌 동안 심심할 줄 알았는데 유로(UEFA EURO 2024)가 열렸다. 여러 축구 유튜브 채널에서 해주는 프리뷰 영상부터 시작해서 결승전까지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봤다. 유로 이후 이적시장을 열심히 들여다 보고 친선경기를 몇 개 봤더니, 두둥. 프리미어리그 새 시즌이 시작됐다. 꺄!! 쏴리 질러!! 내가 선수도 아닌데 경기 전에 자꾸 든든히 먹게 된다. 엣헴.
즐겁고 유쾌한 축구생활,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