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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이불 Aug 30. 2024

에필로그: 내 여자가 축구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

그녀와의 축구생활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학창 시절은 쉬는 시간마다 실내화 바람으로 뛰쳐나가서 친구들과 공을 차고, 하교 후에도 해가 질 때까지 축구를 했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2002년 월드컵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친구들과 거리 응원을 하며 축구에 열광했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는 단연 박지성이었다. 박지성이 PSV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을 때부터 한국에서 해외 축구를 볼 기회가 많아졌고, 나는 맨유 경기가 있는 날이면 새벽에 일어나서 박지성을 응원했다. 짜릿했던 시간들이 흘러 박지성은 QPR로 이적을 하고, 국가대표에서도 은퇴를 했다. 이때 나의 축구도 함께 끝이 나버린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는 국가대표 경기든 프리미어리그 경기든 하이라이트 뉴스로만 축구를 접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풀)이불이를 만났다. 이불이는 국가대표 경기도 직접 가서 본 경험이 있는 직관러였다. 나는 축구를 그렇게 좋아했음에도 경기장을 찾아간 경험이 없었기에 이불이가 신기했다. 당시만 해도 야구와 다르게 축구에는 여성팬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나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우선, 다시 국가대표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내 기준은 2002년과 박지성이 캡틴이던 시절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은 경기력에 대해 몇 번이나 험한 소리를 삼켜야 했던 기억이 있다.


이불이는 국가대표 경기 외에도 토트넘 경기를 즐겨봤다. 무엇보다 손흥민 선수를 응원하는 마음이 클 것이고, 토트넘 자체도 우승권 전력은 아니지만 나름 준수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 23/24 시즌 초반부터 이불이는 나에게 본격적으로 토트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해리 케인이 이적하고 맞이한 첫 시즌.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시즌이었는데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며, 새로 들어온 선수들도 잘한다고 칭찬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나도 다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게 됐다. 이때부터 함께 토트넘 경기를 보며 쏘니가 골을 넣을 때마다 이상한 춤을 추면서 서로 손뼉을 마주쳤던 것 같다. 누가 알았을까. 이렇게 TV로 축구를 보던 우리가 직접 토트넘 경기를 직관하게 될 것을.

세계여행을 준비하면서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에 꼭 직관을 가자고 매일 얘기했다. 이왕이면 토트넘 홈에서 프리미어리그 극강의 팀인 맨시티와의 경기를 보고 싶었다. 티켓팅 도전이라도 해보자며 티켓이 열리는 날짜에 알람까지 맞춰 놓고 기다렸지만, 아뿔싸. 티켓 예매 날짜는 이미 지나있었다. 많은 팬들이 보고 싶어 하는 토트넘과 맨시티의 경기를 보려면 취소표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태국에서 시작된 새로고침은 튀르키예까지 이어졌다. 가끔은 넋이 나가서 새로고침을 하고 있는 이불이를 보기도 했다. 그 정성 덕분일까. 장을 보러 밖에 나갔던 이불이에게 급하다며 연락이 왔다. 좌석 2개를 찜했다는 것이다. 장을 보러 가서도 새로고침을 했나 보다. 고민의 여지없이 바로 진행시켜!를 외쳤고,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런던으로 축구여행을 떠나게 됐다. 이토록 축구에 진심인 여자와 살면 자다가도 런던행 항공권과 토트넘vs맨시티 티켓이 떨어진다.

홀란은 생각했던 것보다 피지컬이 더 좋다. 덕배 안녕?

매번 TV나 조그마한 노트북 모니터로만 보던 축구를 현지에서 직접 보는 경험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팬들의 모습이었다. 이번 경기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섞여 있어서 토트넘이 현재 1위 맨시티를 이기면, 현재 2위 아스날이 리그 우승을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많은 팬들은 토트넘이 지는 것보다 라이벌 팀인 아스날이 우승하는 것을 더 견디지 못해 하는 것 같았다. 경기 후반, 토트넘이 지고 있던 시간에 손흥민이 골키퍼와 1:1 찬스를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손흥민은 거의 놓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무조건 골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골키퍼가 극적인 선방을 보여줬다. 아직도 맨시티의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머리를 잡고 주저앉은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많은 팬들이 손흥민은 (아스날의 우승을 막았기 때문에) 토트넘의 진정한 레전드가 되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현지 팬들 간의 라이벌 심리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펩 감독

선수 몸짓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응원하며 나도 현지 팬들과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 매번 경기력이 아쉬워서 쓴소리를 하게 됐던 선수도 열심히 움직이며 팀을 위해 뛰는 모습을 보니 쉽게 뭐라고 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확실히 직관에서만 볼 수 있는, TV가 담지 못하는 무언가를 느낀 하루였다.




이불이와 축구를 보면 재밌는 순간들이 있다. 우선 내가 초등학교부터 군대까지 축구했던 걸 제일 부러워한다. '체육시간에 피구말고 축구 좀 알려주지...'라며 한스러워한다. 그뿐 아니라, 축구 경기를 보다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던지는 말이 이불이에게는 축구 일타강사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가 보다.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에서 갑자기 나를 전문가라고 부르며 축구 지식이 많아서 보이는 것도 많겠다며 부러워하는 이불이의 반응이 참 재밌다. 이런 이불이 덕분에 애매하게만 알고 있던 규정들을 찾아보게 되고, 다음 경기 때 제대로 설명해 주기도 한다. 요즘은 오히려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이불이에게 내가 배우는 실정이다.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자투리 시간이 많이 생기는데, 그 시간을 활용해서 유튜브 축구 채널을 섭렵하더니 어느새 축구 전문가가 되어버린 건 이불이 같다.


런던 여행 이후 나와 이불이는 축구의 매력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세계여행을 하고 있음에도 주말이 되면 가고 싶은 장소를 정하기보다 어떤 경기가 재미있을지를 먼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 신기하다. 지금 우리는 유럽의 한 도시에 있다. 저녁마다 동네 펍에 모여서 응원하는 현지인들을 보면 우리도 빨리 응원하는 팀을 정해서 유니폼을 사 입고 또 한 번 직관을 가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많은 경기를 보고 있지만 아직까지 응원하는 팀을 정하지 못했다. 이번 시즌에는 평생(?) 응원할 팀을 정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같은 팀을 응원하게 될까. 아니면 서로 다른 팀을 응원하게 된 탓에 다른 유니폼을 입게 될까. 서로 다른 팀을 응원하게 되고, 그 두 팀이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맞붙게 된다면 어떨까. 앞으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축구를 즐기고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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