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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 잠깐만 죽을게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by 지인 acquaintance


봄이 지나가고 있다. 한 해의 6월을 이렇게나 빨리 마주하게 될 줄을 올해 초엔 정말 몰랐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가 진짜 빠르다는 것을, 어릴 때 어른들이나 하시던 말을 지금 내가 벌써 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만큼 어쩌다 하루는 느린데 일주일은 놀랍게도 빨리 지나가버린다.


시간을 느리게 흘러가도록 하는 내가 가진 가장 명확한 방법은 시를 읽는 일이다. 나를 느슨하게 만들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방법이다. 실용적인 세상 속에서 꽤나 비실용적인 일처럼 느껴지는 시집 읽기가 나는 아주 마음에 든다. 내가 세상에서 요구받는 것과 반대의 것을 선택하는 기분이다. 내가 선택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는 왠지 모를 반대의 시간을 갖는 것이 나를 아껴주는 방법이라 여겨져서, 그래서 굳이 시집을 펼쳐드는 시간을 가진다.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구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느릿한 아침 위로 햇빛이 내리쬐고, 드디어 인정해 버린 나의 지침과 슬픔이, 그마저도 정돈된 정물의 형태로 다가왔다.



어디로 굴러갈 염려도 없이 삼각형 모양으로 누워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길다 한들 끝과 끝이 명확한 선분의 단정함에 대해서도 상상해 본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무한소수인 원주율의 온전함에 대해 내가 아는 것만큼 외워본다.



고요하다 못해 정적이 흐르고 적막한 아침이 그려진다. 삼각형은 왠지 비탈길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고 균형감 있게 멈춰서 있을 수 있는 도형이라고 여겨졌다. 비탈길이 아주 매끄럽진 않겠지 그 길도 분명 울퉁불퉁 할 테니 뾰족한 삼각형의 모서리가 힘주고 발 디딜 구석 한 곳쯤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눈을 감아본다. 그렇게 잠깐만 죽고 싶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숨을 헤아린다.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들락거릴 때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분명 잘 살고 있지 않는데 눈물도 한숨도 잊고서 슬프지 않은 것처럼 살아온 듯하다. 그래서 잠깐만 죽고 싶은 걸까, 어디에서도 목격될 리 없는 끝이 맺어진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그럴 리 없는 것을 상상하는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 누구보다 명증 하며 정확한 계산과 원리에 밝은 수학자는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며 밤이 지나가고 해가 뜬 것에 대해 꽤나 지쳐 보인다. 그렇게 잠깐만 죽었다가 일어나도 괜찮지 않을까. 답이 있는 아침을 맞이하는 삶이 아니니 휘어지는 직선의 길이를 가늠해 보는 것이 모순처럼 읽히지가 않는다.



굳이 시집을 펼쳐 들고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 시간이 내가 '잠깐 죽는' 시간인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슬플 때는 충분히 슬퍼졌으면 좋겠고, 사는 게 복잡할 때는 그럴 수만 있다면 잠깐 죽는 것이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 일어나기만 한다면야 잠깐 죽는 것쯤이야 응원해 줘야지.


그러니까 혹시나 어쩌다가 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옆에서 당신이 깨워주면 좋겠다.

혹 당신이 너무 길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깨워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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