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못 써도 괜찮아: 일생 단 한 번의 자서전 쓰기【제3강_#2】
앞선 강의에서 우리는 좋은 문장을 만드는 원칙을 알아봤습니다. 문장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설득력 있게 사건을 묘사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공부했죠. 이제 그 사건들을 나열해 하나의 꼭지를 완성할 차례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배운 적이 있고, 한 번 실습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왜 다시 구조를 다루는 거야' 하며 화를 내진 말아주세요. 시행착오가 필요한 과정이라서 일부러 순서를 그렇게 맞췄습니다.
한 꼭지를 만들면서 뭐가 가장 어려우셨나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갖진 않으셨나요?
“대체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 걸까?”
이 의문은 매우 타당합니다. 여러분은 구조를 세우지 않은 채 바로 한 꼭지 완성을 위해 나아갔으니까요. 이 경험은 구조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작동할 것입니다.
글을 쓸 때 ‘구조를 세운다’는 말은 여행을 떠날 때 목표점을 정하고 경로를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부산에 가더라도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바로 갈 수도 있고, 천안과 대전과 대구를 들러 천천히 갈 수도 있습니다. 부산이라는 목적지가 중요할 수도 있고, 천안과 대전, 대구와 같은 경유지가 중요할 수도 있죠. 그래서 여러분도 자서전을 쓰실 때는 유의하셔야 합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어디를 거쳐 갈 것인가’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이쯤에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자서전에서는 보통 ‘어디를 거쳐 갈 것인가’가 중요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 말씀을 굳이 드리는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구조 세우기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경로가 나오기 때문이죠.
하지만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어요. 우리는 지금 경로가 더 중요합니다. 즉 천안과 대전, 대구를 거쳐 가기 위해 부산이라는 목표점을 설정할 수 있다는 거죠. 이런 경우에는 그게 부산이 아닌 마산이나, 제주도가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글의 목표점, ‘나는 이 글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는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필요에 의해 일단은 그냥 정해두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부담을 갖지 마세요. 부산을 향해 나선 여행길이 결국 어디에서 끝날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천안과 대전, 대구만 확실히 챙기면 되니까요.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었던가요?
기억하세요. 여러분의 글이 최종적으로 어디에 도착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건 가봐야 아는 거예요. ‘구조는 곧 경로다’ 일단 이렇게만 이해해 두시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글의 구조란 구체적으로 ‘목적지로 가는 경로’ 즉 ‘사건을 배치하는 순서’를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프로페셔널이 아닙니다. 의도한 대로 글이 맺어질지, 아닐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실 이건 전문작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보통의 글쓰기에선 크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예요.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덩어리를 앞에 두고 처음부터 성모자(聖母子)를 조각하려 했는지, 아니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흔한 모자를 조각하려다가 결국 피에타가 나왔는지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진실은 저도 모르고 여러분도 모릅니다. 작가만 알 뿐이죠.
소설가는 소설로, 시인은 시로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단지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지죠. 글이 실제로 도달한 곳이 어디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독자의 판단따위는 어떻게 되든 내버려두고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서로 연관성 있는 사건을 추려내 배열한다.
이를 위해 자서전에서 가장 쉽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나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해의 임신 소식에 이은 아내의 입덧, 이듬해 출산 등으로 사건을 놓으면 무난하고 자연스러운 구조가 완성됩니다.
하지만 목표점이 정해져 있다면 이 배치는 바뀔 수도 있겠죠. 만약 ‘아버지로서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일단 사건이 부족하겠죠. 아이의 출산 정보만으로는 이 이야기를 다 꾸려내기 어렵습니다. 아이의 성장과정에 있었던 다양한 사건이 추가돼야 합니다. 아이의 결혼, 독립과 분가, 손주 출산 등에서 시작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이쯤에서, 눈치 채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훌륭한 구조는 가능한 사건을 잘게 나누고, 촘촘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완성되는 겁니다. 때로는 그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고도 감동적인 서사를 완성하기도 합니다. 구조가 어렵다면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마시란 말씀입니다. 그냥 사건의 순서를 이리저리 바꿔보면서 어떤 이야기가 완성되는지 혼자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정해집니다. 이 글은 과연 어디에 도착할 것인가!
목적지 설정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라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글은 주제가 명확해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방향 설정과 구조 수립이 중요한 거 아닌가?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죠? 자서전을 쓰고 있고, 저는 이 일이 ‘조각’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우리는 지금 뭘 만들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재료를 들고 계속 깎아내고 있는 겁니다. 이게 뭐가 될지는 아직도 모르고요. 그러니까 일단은 더 깎으세요, 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책임한 소리 아닌가 하시겠지만, 아닙니다.
여러분께서 자서전을 쓰실 때 크게 주의하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인생의 대단한 성찰,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던 삶의 의미 탐구, 이런 걸 하려고 하지 마세요. 직접 글로 쓰는 대신 어떤 장면으로 보여주기만 하세요.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자서전은 들려주는 게 아닙니다. 단지 보여주기만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걸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든 그것은 여러분의 몫이 아닙니다. 그건 독자의 역할이에요. 그걸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을 정해두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자서전 쓰기에서 염두에 둬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일지도 모릅니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앞만 보고 가다보면 중간에서 무리하기 쉽습니다. 자서전에서 무리라 함은 대개 ‘과장’이나 ‘감정과잉’입니다.
내 인생은 항상 옳은 판단을 해온 것이 아닌데 결론을 ‘옳은 판단과 성찰’로 정해놓으면 당연히 무리가 따르겠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른 판단과 잘못된 생각’으로 정해놓으면 그곳으로 가기 위해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야 할 때가 생깁니다. 결국 ‘기뻤다’, ‘성공했다’, ‘귀한 경험을 얻었다’ 아니면 ‘슬펐다’. ‘실패했다’, ‘후회스럽다’라는 뻔한 말로 결론을 지어야 할 때가 닥치고요.
더군다나 사람의 인생사라는 게 그렇게 무 자르듯 잘리는 거였던가요? 오히려 인생이라는 무를 자르지 않는 게 더 겸손하고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츤데레(ツンデ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말이라 죄송스럽지만 우리말로는 설명드리기가 쉽지 않아 굳이 씁니다. 겉으로는 차갑고 퉁명스럽게 굴지만 속으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심성을 가진 사람을 이를 때 쓰는 말이죠.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사실 츤데레는 우리나라에 더 많다. 대한민국은 츤데레의 나라다.
글쓰기 강의에 나올 때마다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글을 쓸 때는 츤데레가 되셔야 합니다.
기쁘다, 슬프다, 안타깝다 직접 말하지 마세요. 기쁜 장면과 슬픈 장면, 안타까운 장면을 그냥 슬쩍 보여주세요. 여자친구에게 꽃을 선물하면서 오히려 무심한 척하며 “오다 주웠다”고 얘기하는 요즘 젊은 친구들처럼 글을 쓰세요. 그게 훨씬 강력하고, 더 깊은 마음까지 가서 닿습니다.
구조를 세우는 데 있어서도 츤데레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츤데레식 구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완성됩니다.
첫째, 결론을 정해두지 않음으로써 과장과 감정과잉을 방지한다.
둘째, 사건을 무심하게(츤데레처럼) 연결함으로써 더 많은 긴장을 유도한다.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IMF와 나’라는 꼭지라고 가정합니다.
【非츤데레식 구조】
※ ‘IMF는 나를 성장시킨 시련이었다’로 목적지 설정
구조 : 구조조정 발표 → 불안 → 극복 노력 → 재취업 → 결론 반복
처음부터 "시련이 나를 성장시켰다"고 선언하고, 그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 사건 배치
‘기뻤다’. ‘큰 보람이었다’. ‘시련을 통해 한층 성숙했다’ 와 같은 전형적이고 강요된 결론
⇒‘ ‘누구는 안 그랬나?’, ‘과연 만족스럽게 극복했나?’ 하는 의문과 반감
【츤데레식 구조】
※ 목적지를 따로 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건만 연결 ※ 목적지를 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건만 연결
구조 : 구조조정 발표 당일의 풍경 → 집에 돌아와 아내와 나눈 대화 → 쓸쓸하고 위태로운 출근길 → 일주일 후 사표 제출 →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재취업 기회
일어난 일을 순서대로 보여줄 뿐. 의미는 독자가 찾도록
시련을 ’극복했다’가 아닌 ‘극복된다’로 겸손한 태도
⇒‘이 사람은 그랬구나’, ‘나도 그랬었지’하는 응원과 공감
보시다시피 구현이 굉장히 쉽습니다. 일단 그냥 연결성 있는 사건을 나열해서 하나의 꼭지로 잇는 것뿐이니까요. 그것만으로 츤데레식 구조 완성입니다.
지난 2강에서 완성했던 여러분의 한 꼭지가 뭔가 어설퍼 보였다면,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구조적 완성도가 생깁니다. 왜냐? 그게 바로 매우 전형적인 츤데레식 구조거든요. 나중에 봐도 여전히 불만스럽다면 그때 배치를 바꾸든, 연결을 강화하든, 뭔가를 더하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아주 많습니다.
사건을 수용한 단락을 일단 완성해놓고 배열을 고민하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 번쩍 성찰의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게 ‘진짜’이고, 여러분 자서전의 보석입니다. 그 순간을 잡으세요.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젊은 아들입니다. 홀로 늙은 아버지를 부양하며 살고 있었죠. 그러나 아들은 곧 죽게 되고 아버지 혼자 세상에 남겨집니다. 그래서 아들은 텔레비전이며 세탁기 같은 가전기기들의 사용법을 조금씩 알려줍니다. 하지만 늙은 아버지는 아들이 가르쳐주는 것들을 쉽게 익히지 못하죠. 아들은 짜증을 내면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법을 알려줍니다. 슬픈 표정 한 번,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이 장면을 보며 관객들은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깊고 진정한 감동은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오늘의 ‘구조’ 강의는 여기에서 마칩니다. 쓰다보니 구조가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듯한 이상한 구조 강의가 돼버렸네요.
구조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보다 전략적인 구조 세우기를 위해 발상을 전환하고, 조금은 미뤄두는 게 현명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과제는 츤데레식 구조론에 입각해 현재 본인이 갖고 계신 ‘한 꼭지’를 재검토해보는 것입니다.
결론을 정해두고 작성한 글은 아닌가? 감정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건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가? 등이 주요한 체크포인트입니다.
기억하세요. 담담한 감정이 사실은 가장 절실한 감정입니다. 본인은 몰라도 독자는 그걸 금세 알아챕니다.
다음 강의에서 뵙겠습니다.
오늘도 노래 선물 하나 남기고 갑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연배우 한석규가 직접 부른 OST입니다. 10월도 거의 다 갔네요. 평안한 가을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1. 이 강의는 주 2회(매주 월/목요일)을 기본으로 진행합니다. 1강당 평균 3회 분량입니다.
2. 댓글로 질문 받습니다. 짧게 즉답이 가능한 답변은 댓글로 드리고, 중요한 내용은 모아서 마지막 강의에서 Q&A로 진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