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미팅
06. 미팅
누나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처남으로부터 일단 긍정적인 답이 왔다. 준호는 자신의 모험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기 위해 서둘렀다.
며칠 후, 그는 아내와 함께 선보는 장소에 미리 와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으나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 있었다.
“정현 씨한테는 어떻게 이야기해 보았어요?” 아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꼭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일이 잘되면 그때 차분히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영선이 입구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먼저 그의 손짓에 답례 한 사람은 그녀를 뒤따라 들어선 처남이었다. 마치 밖에서 만나 같이 들어오는 듯, 결국 두 사람이 오늘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알고 멋쩍은 웃음으로 분위기는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풀려나갔다. 여름 복장으로 드러난 그녀의 피부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고, 자신의 진 모습을 보여주듯 미모에 걸맞은 차림은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역시 젊음은 신선하고 향기로운 것이야.’ 준호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저러할 때가 있었나 싶었다.
“매형은 이런 분을 왜 이제 소개해 주는 겁니까.” 영선을 본 처남의 과장된 웃음과 들뜬 표정이 그의 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집안이 인물들이 좋으신가 봐요.” 그녀도 처남의 말을 곧잘 받으며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준호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예감이 잘 될 것 같은데 당신 보기에는 어때?”
“오늘 처음 만났는데 아직 몰라요, 더 두고 봐야죠, 속없는 녀석, 얼굴 예쁜 여자한테는 사족을 못 쓰는 꼴이라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 아내도 싫지는 않은 듯했다.
둘만 남기고 호텔을 나오는 준호는 시원섭섭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저 밑바닥에 남아 속을 불편하게 했던 찌꺼기랑 깨끗하게 비우자, 이젠 진실로 두 사람이 화합하여 행복해지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뭐 있겠는가.’ 그는 그녀를 비로소 가족으로 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로 처남과 영선의 상황이 궁금하였지만, 조심스러워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간간이 아내에게 전해 듣는 것이 고작이었고, 예상보다 순조롭게 잘 만나고 있다는 소식에 안도할 뿐이었다.
금요일 오후 퇴근 무렵이었다. 걸려온 전화는 뜻밖에 처남으로부터였다.
“매형! 퇴근 때 시간 좀 되세요.”
“왜? 처남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는 긴장했다.
“아니요! 저 지금 영선 씨하고 같이 있는데, 매형 오늘 저녁 저희와 같이 식사하지 않으시겠어요?”
“왜? 갑자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런 것은 아니고요, 영선 씨가 매형 회사 근처에 좋은 식당이 있다고 해서요.”
“엉? 무슨 데이트를 다른 좋은데 많은데 이런 곳에서 한다고?”
“예! 영선 씨가 옛날 회사 다닐 때 그 식당이 좋았나 봐요.”
“그래? 어디를 말하는 거야?”
아내에게 저녁 식사를 하고 들어가겠다고 전화하고 회사를 나오면서 그는 그들 관계가 상당히 발전된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잘 됐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는데.’
회사 근처라고 하는데 그는 처음 오는 곳이었다.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에 둘은 이미 오래된 연인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제 영선은 자신과는 가깝고도 먼 사이가 된 것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아니! 젊은 사람들이 데이트하는데 나이 든 사람을 왜 불러내는 거야.” 낯익은 향이 코의 끝을 스친다. 지난번에 자신이 선물한 향수이기도 했다.
“영선 씨가 이곳에 오면 매형 생각이 난다고 해서요.”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요?”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 두 사람이 그렇게 앉아있어 보기 좋은데, 이 사람이 잘해주고 있나 모르겠네, 어떻게 맘에 들어요? 하하하.”
“예! 잘해주세요, 저도 잘하고 있고요.”
“잘됐네, 뺨 맞을지, 양복을 얻어 입을지 걱정했는데.”
“매형! 제가 얼마나 신경 써서 잘하고 있는데요, 곧 양복 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하하.”
“그래! 식사만 하고 나는 빨리 갈 테니 둘이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해, 음식 주문하자!” 그는 종업원을 부르고 메뉴를 살피면서도 자신을 향한 영선의 눈길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진행은 잘 되고 있나?”
“무슨 진행요?”
“결혼이지! 결혼 이야기는 아직 안 한 거야?”
“벌써요? 에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매형이 너무 나가시는 것 같아요, 하하하,” 처남은 영선의 눈치를 보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식사하면서도 왠지 어색함을 느꼈다. 기대했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달리 대화가 자주 끊기는 것이 영선이가 별로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후추 병도 집어주고 티슈도 챙겨주는 처남의 모습과는 달리 죄지은 사람 같이 고개 숙이고 식사만 하는 영선이가 생소하고 신경이 쓰였다.
“영선 씨! 우리 포도주 한잔할까?”
“예? 좋아요, 전무님!” 그녀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전무님은 운전하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나야 회사에 차 두고 가면 되지”.
“아니 술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술 이야기 나오니까 그렇게 반색할 줄이야! 하하하.”
“내가 언제 술 못한다고 했나요, 잘못한다고 했는데.”
“진즉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술 마시는 곳 좋은데 많이 알고 있는데 말이죠.” 밝아진 그녀의 모습에 처남도 신이 나는 모양이다.
분위기 맞추기 위해 마신 서너 잔의 술이 거나해진 것을 자리에서 일어나 보고 알았다.
“나 먼저 갈 테니 잘들 놀다 들어가.”
“전무님! 우리도 곧 일어날 텐데 같이 있다 가시면 안 되나요?”
“무슨 소리야! 두 사람은 오늘 늦게까지 실컷 놀다 가요, 2차도 가고 노래방도 가고, 처남 여기 카드 있으니 이걸로 오늘 비용 쓰고 영선 씨 집까지 잘 바래다주도록 해.”
밖은 벌써 어둠이 깊어졌고 택시 잡기도 어려웠다. 겨우 대리기사를 불러 집으로 가는 그는 마음에 자꾸 걸리는 것이 있었다. ‘오늘 분위기도 그렇지만, 가겠다고 일어나는 자신을 쳐다보는 영선의 눈빛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직 씻어지지 않은 뭔가가 남아있는 것인가.’ 지금 처남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다음날 카드를 돌려주기 위해 방문한 처남한테 들은 이야기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왜? 쓰라고 줬더니 쓰지도 않았어?”
“매형 가신 뒤 저희도 바로 나왔어요. 다른 곳에 가서 좀 더 지내려 했는데 영선이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해서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그냥 집에 바래다줬어요. 매형이 계실 때부터 말도 없이 좀 힘들어했었잖아요.”
“그래? 어떻게 영선이가 처남 마음에는 드는가?”
“예! 저는 잘해보고 싶어요.”
“영선이는 어때? 처남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기는 하나? 준호는 정말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았다.
“예!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둘이 있으면 곧잘 이야기도 잘하고 표정도 밝은 것이 제가 싫었으면 이렇게 계속 만나주겠어요?”
“그럼, 진행을 좀 빨리해도 되겠네.” 처남보다 자신이 더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만 우리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사귀고 싶어요. 저도 아직 결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요.”
“준비? 뭐가 준비가 안 되었지?”
“준비된 것이 별로 없어요.”
“아니 처남은 지금까지 준비도 안 하고 여자부터 찾은 거야? 그동안 결혼자금 좀 모아두지 않았어?”
“매달 쓰기도 빠듯해서 그럴 틈이 없었어요.”
결혼은 없으면 없는 데로 형편에 맞춰서 하면 되지, 하면서도 막상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준호도 걱정이 앞섰다. 처가라고 둘러봐도 경제적 도움을 줄 사람은 오로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진 것이다.
어느 날, 권수길은 황 구현으로부터 안부 전화 겸 저녁 식사나 같이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잘 됐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소송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는데, 요즘 그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나 알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권 사장! 힘들지요? 어떻게 사정은 좀 나아졌어요?”
“요즘 경기도 그렇고 좀처럼 허리 펴기가 쉽지가 않네요.”
“내가 코가 석 자라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요. 그래도 권 사장은 아직 사업은 하고 있다면서.”
“사업은 무슨 사업입니까! 변두리에서 잡철 부스러기나 만지고 있는데 오죽하겠어요.”
“그래도 나보다 낫네, 나는 지금 계속 놀고 있잖아, 어디 작은 곳이라도 취직은 해야 하는데 영 마땅치가 않아.”
“아니! 그 능력 있는 형님이 계시는데 왜 그렇게 사세요?”
“형님? 말도 말아, 그렇지 않아도 오전에 그 회사에 들렀다 나오면서 당신 생각이 나서 전화했던 거야.”
“그나저나 그 회사는 이 불경기에도 잘 돌아가는가 보지요?”
“잘 돌아가면 뭐 해, 나하고는 이제 상관이 없는 데, 뭘.”
“왜요? 형님께서 전혀 도와주지 않으세요?”
“도와주기는커녕 형님 만나기도 힘드는데 뭘.” 구현이가 술과 함께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지금도 형님에게 도움 좀 청해볼까 해서 갔었는데 얼굴도 보지 못하고 왔지 뭐야. 형수한테 꼭 잡혀 꼼짝하지 못한 꼴이 기가 차서 말이야.”
“형님이 형수님에게 쥐여사는 모양이죠?”
“회사가 형수 회사나 다름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럴 수가 없지? 형도 옛날 말이지 많이 변한 것 같아.” 그는 취기가 오르자 아예 형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일종의 동병상련 아픔이랄까.
“부장님! 그런데 말이죠. 그때 우리가 납품했던 것 지금도 창고에 그대로 있나요?”
“그것 아직도 안 가져갔어?”
“가져오면 뭘 합니까? 운송비하고 폐기물 처리비용만 더 나가는데, 또 그것을 가져오면 완전히 하자를 인정하는 것이 되는데 우리는 납품한 상태로 소송에 들어가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부장님께 부탁드리는데 그것들이 전량 그대로 창고에 잘 있는지 혹시 회사에서 일부라도 사용하거나 처분했는지 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아니, 권 사장! 그렇다고 내가 형님을 궁지에 모는 짓은 할 수가 없지, 그리고 내 처지에 창고에 들어가 조사할 방법도 없어요.”
“부장님 미안합니다. 다만 나는 도와줄 사람은 부장님밖에 없고, 이러다가 돈은커녕 외려 창고 보관료까지 물어야 할 판에 그저 다급한 마음에서 여쭤보았습니다.” 사실 권 사장은 태광산업에서 물품보관료와 폐기물 처리비용에 대한 청구가 들어올 상황도 부담이 되었다.
“권 사장의 사정은 잘 알겠는데 그래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맙시다.”
김 기사는 사장에게 걱정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경찰서로 향한 그의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형사 앞에 앉자 그의 단순했던 걱정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상황은 예상 밖으로 심각했다. 아이가 중태에 빠져 어제 수술을 마치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차 옆으로 뛰어들어 오는데 어떻게 피할 방법이 있겠어요, 우리 차 부딪힌 부분 사진도 찍어서 여기에 가지고 있습니다.” 김 기사는 사진을 제시하고 사고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김 기사의 설명을 들은 형사는 충분히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차가 과속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확인했습니다. 당시 사장님이 같이 타고 계셨나요?”
“예.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나요?”
“다른 것은 걱정할 것이 없겠는데, 상대가 어린 아이고 많이 다쳤는데도 선생님이 구호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구호 조치고 뭐고, 아이가 없어져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단순히 엉덩방아 찧을 정도로 가볍게 넘어지고 멀쩡하게 일어나 도망갔으면 당시에 신체가 상해를 입었다고 볼 수 없지 않나요?”
“글쎄요, 뺑소니에 해당 여부는 검사가 판단할 상황이라 저희가 말씀드릴 것은 없지만 사고 당시 만약을 생각해서 경찰에 먼저 신고를 하셨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일단은 피해자와 합의하신다면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먼저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 보시죠.”
김 기사는 아이의 입원한 병원과 인적사항을 받아 들고 허둥지둥 경찰서를 나섰다. 생각보다 꼬인 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다 일단 사장님에게 보고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받은 정현이도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아이가 많이 다쳤다고?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나? 그럼! 어떻게 우리가 형사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인가?”
“아직 우리가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지만, 경찰에서는 아이의 아빠가 문제화하려고 하니 일단 피해자와 합의를 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합의? 아이고! 일이 어렵게 됐잖아! 자네 지금 어디에 있나? 회사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병원에 가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부모와 합의를 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보게, 혼자 가지 말고 보험사 직원과 같이 가는 것이 좋겠다.”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 있던 영수는 미리 형사로부터 전화를 받은 터라서 다가오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봤다. 그는 다친 자기 아들을 버리고 가버린 그들에 대한 분노로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힘주어 그들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얼마나 놀라고 상심이 크십니까?” 보험회사 직원이 다가가 인사를 하고 자신의 소개를 하기도 전에 영수는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태광산업에서 나왔습니까?”
“아니, 이분이 회사에서 오셨고 저는 보험사에서 나왔습니다.”
“당신이 태광산업 사장이요?”
“아닙니다. 저는 그때 운전했던 사람입니다.”
“좋아요, 그럼 운전한 본인에게 물어봅시다. 왜? 도망갔어? 어! 사고를 내고 왜 도망갔냐고! 자기들 자식이었다면 그렇게 다친 아이를 팽개치고 갔겠냐고, 그때만 애를 병원에 데리고 왔어도 저 지경은 되지 않았을 텐데 왜 그냥 가버린 거야? 도망가면 안 잡힐 줄 알았지?”
“아버님! 진정하시고 제 말 좀…”
“진정? 무슨 진정! 그때 사장도 같이 있었다면서, 이제 사장은 쏙 빠지고 운전기사만 보내 무마해 보겠다는 거지, 어림없는 짓 하지 말라 그래. 이제 너희들은 다 죽었어!” 영수는 입에 거품을 물고 병원에 있는 사람이 다 듣도록 소리소리 질렀다. 김 기사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 몇 마디 설명을 해보려고 시도했던 보험사 직원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김 기사에게 일단 물러나자는 신호를 보내며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협상을 유리하게 하려고 처음에 저렇게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너무 겁먹지 마시고 일단 보험접수를 하였으니 오늘은 철수하시고 내가 내일 혼자 만나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볼 테니 그런 다음에 서로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눅이 잔뜩 든 김 기사는 앞날이 캄캄해졌다. 합의가 간단하게 끝날 것 같지 않고 더구나 사장님을 연루시키려는 그의 의도가 못내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만약에 저 사람이 끝까지 합의를 안 해주면 어떻게 해야 하죠?”
“결국, 돈이 문제지 협상이 안 되는 것은 아니죠. 너무 터무니없이 합의금을 요구한다면 적당한 금액으로 공탁을 해놓고 법의 판단을 받아봐야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단 먼저 내가 만나고 전화드릴게요.”
아들은 회복되어 일반 병실로 돌아왔다. 식사도 잘하고 놀기도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좀 어눌해지고 한쪽 팔에도 힘이 잘 쥐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사 말로는 차츰 나아질 테니 운동 열심히 하라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달라진 아들의 모습에 영수는 걱정과 속 상하는 맘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뭐요? 우리 아이가 없어져서 그냥 갔다는 거요? 그러면 경찰에 신고라도 해서 아이를 찾았어야지. 분명히 아이가 부딪치는 것을 알았으면서 아이의 상태를 확인도 안 하고 갔다는 것 아닙니까? 동내 아이가 가면 어디로 갔다고 기껏 골목길에 살고 있을 아이를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갔다는 것은 아이의 안전 따위는 무시한 것 아닙니까? 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요.” 과일바구니를 들고 찾아온 이 과장 세워놓고 그는 여전히 자신의 분노만 풀어내고 있었다.
사장한테는 아이의 아빠가 화가 나 있어 당장 합의를 볼 수는 없었으나 보험사에서 잘 알아서 처리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고 보고한 뒤 이 과장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믿었던 이 과장의 전화는 실망스러웠었다.
“얘 아빠는 아직도 완강하게 뺑소니 주장을 하면서 대화가 안 되고 있어요, 회사 사장님이 직접 와서 사죄하라고 고집하는데 혹시 사장님께서 한번 병원에 방문하실 수가 있나요?”
“아! 그것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 입장도 곤란해지고, 또 아무래도 사장님이 전면에 나서면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합의금도 엄청 높아질 것 같기도 하니 그냥 제 선에서 해결했으면 합니다.”
“이해합니다. 그럼 일단 보험으로 대처하고 만약의 경우 소송으로 갈 경우도 대비하셔서 변호사와도 상의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불안한 김 기사는 최악의 경우 자신과 사장님에게 어떠한 처벌이 내려지는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는데 잘못 얽히면 그 대가가 결코, 가볍지 안 다는 것을 알았다.
‘사고를 발생시킨 운전자는 사고 발생 시 즉시 정차해 구호활동을 할 의무를 지닌다. 피해자가 응급실에 실려 가야 할 만큼의 긴급 사항이 아니더라도 피해자에게 자신의 성명이나 전화번호, 주소 등의 인적사항을 제공해야 한다. 해당 법에 명시돼 있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교통사고 현장을 이탈했다면 특정범죄 가중 처벌법에 따라 1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00만 원 이상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될 수 있다.’
준호 아내는 저녁 식사가 끝나자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오늘 준구가 왔다 갔어요.”
“처남이 왜?”
“결혼하고 싶은데 돈 때문에 걱정을 한바탕 하고 갔어요.”
“결혼 비용이야 둘이 그동안 수입이 있었으니 같이 맞춰 나가야지, 방법이 없잖아.”
“그래도 남자 체면이 있지 전세 얻을 돈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집이야 지금 두 사람이 각각 살고 있는 집을 합치면 충분하지 않아?”
“문제가 준구가 사는 집이 월세라는 것이지, 자신도 최소한 영선이 전셋돈 정도는 합해서 직장 다니기에 좋고 크기도 좀 더 큰 집을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좋아요.” 아내는 마치 죄인이 된 양 손톱을 만지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우린 여유가 전혀 없는가?”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가 뭔 여유가 있겠어요.”
“거참 우리가 여유가 없으니 뭐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잖아.”
‘그래도 자신이 벌어다 준 돈도 적지 않은데, 평소 자기 몸과 집안 치장에 드는 소비 좀 줄이고 저축이라도 좀 했으면 오죽 좋았을까.’ 그는 경제권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이럴 때를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다니 맥이 빠져 더 뭐라 할 이야기가 없었다.
“이럴 때 정현 씨 도움을 좀 받을 방법이 없을까요?”
“뭐? 이 사람이 우리 자식 문제라도 그런 부탁하기 어려운데 처남 일로 어떻게 그런 이야기 한단 말인가.”
“그냥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 빌려 달라는데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당신이 그 회사에 그동안 한 노고를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도 못 해 준다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안 된다고! 나는 그런 소리 못하니 가당치 않은 소리 하지도 마세요. 처남도 한심해, 만날 때마다 결혼할 여자 타령하더니 그렇게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준호의 언성이 높아지자 아내는 또 입을 다물고 발딱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그는 화가 치밀었다. 그는 지금 경제적 어려움이 아내의 경제관념 부재로 여기고 아내의 탓으로 돌리기에 급급했다. 영선이를 처남에게 소개할 때 이런 상황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추진부터 한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