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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온 Apr 30. 2024

샤프

#2/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차가운 책상 유리 위에 올라가 하염없이 내가 쓰이길 기다린다.

요즘 일교차가 큰 날씨이지만 이곳은 여전히 춥다. 외로워서 그런가. 




 학생 때는 나를 맨날 찾았는데 요즘은 날 찾는 시간이 극히 드물다. 독서모임 한다고

종종 찾곤 하는데 그때마다 밑줄을 치고 모니터 속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따라 무언가 적기도 한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의 손이 따뜻하다.

 그가 독서모임을 하기 전에는 한동안 필통 속에서 오래 빛도 못 본채 갇혀 있으려니 너무 답답했다. 내 안에 있는 샤프심은 얼마나 답답할까. 그래도 기다리면 낙이 온다고 했던가. 샤프심에게 이제 희소식을 전달해 줄 수 있게 됐다. 


"샤프심아 우리 이제 자주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독서모임을 한다고 날 사용한 이후로 몇 번을 필통에서 들락날락하다가 이제는 아예 밖으로 나와서 살고 있다. 바깥공기가 이렇게 시원했나 싶다. 몇 번 나왔다 들어가던 때랑 왜 다른지 모르겠지만 아주 상쾌하다.

그가 대학교에 다닐 때에 사용하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날 찾지 않았다. 아예 잊은 듯했다. 날 자주 찾지 않아서 차갑게 식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시 한번 그의 손길을 느끼니 꽤나 따뜻한 손이었다는 걸 오랜만에 느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몇 번의 계절이 변화할 정도로 오래 멀어졌다가 며칠 새 언제 그랬냐는 듯 가까워졌다. 내 친구들도 함께 나오면 좋겠다. 나만 나오니까 필통 속 내 오랜 친구들의 시샘이 느껴진다. 

 필통 속에 볼펜, 형광펜 등 여러 펜들과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나 혼자 밖에 나와있다.

특별 대우인 건가? 지우개랑 짝으로 나와있다. 혼자가 아니어서 덜 외롭다. 내 옆엔 노란색 지우개와 늘 함께 있다. 아무래도 매일 아침 나를 찾는 내 주인은 다른 펜들보다 나와 지우개한테 더 애정이 가나 보다. 전처럼 그는 적극적으로 나와 함께한다. 내가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아니,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존재의 이유를 알고 있으니 사명감 또한 느껴진다. 샤프심도 한껏 힘을 내는 게 느껴진다. 경도가 약한 샤프심인데 생각보다 잘 안 부러진다. 존재의 이유를 알게 되면 내 안에 삶의 목표가 세워지기 마련인데 샤프심도 그걸 느꼈나 보다.


 과거에 그가 대학생일 때 학교 앞 문구점에서 나를 고르고 그의 필통 속으로 들어간 이후로

매일 그의 손에 붙들려 수많은 글씨들을 써냈었다. 대학생은 글씨를 많이 쓰는 직업이다. 그때는 적당히 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생각이 현실이 되어 거의 1년을 쉬었다. 모든 것이 생각하는 대로 되진 않지만 그 생각이 적잖은 영향을 주는 건 직접 경험해 보니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지우개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말랑말랑했는데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 옛날보다는 딱딱해진 것 같다며 투정을 부린다. 1년 동안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도, 경험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온 듯하다. 오랜만에 필통 입이 열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비장한 표정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어찌 됐든 많이 사용되지만 사용되지 않을 때는 필통에 들어가지 않고 그가 노트북 자판을 금방이라도

불이 날 것처럼 빠르게 누르는 광경을 보고 있는다. 아마 내일 또 쓰려고 넣지 않는 것이겠지. 바깥에 있어도 필통 안에 있었던 때가 길었던 탓에 때때로 외로운 감정을 느낀다. 요즘 자주 쓰였다고 하지만 이런 감정이 지속된다는 건 심리 상담이라도 받아봐야 하나 싶다.

 그가 또 노트북 자판에 빠르게 글을 적어 나간다. 맨날 띄엄띄엄 쓰니까 타자속도가 느린 줄 알았는데 무슨 영감이라도 떠올랐는지 엄청 빠르게 글씨로 채워나간다.  


"그래, 저렇게 많은 글이 쓰고 싶으면 나보다는 노트북이 훨씬 낫지 안 그래?"

"맞아 저거 쓰다가 아니다 싶어서 지워봐. 나는 며칠 안 돼서 녹아 없어질 거야. 으... 상상만 해도 끔찍해"


 지우개의 말에 웃겨서 낄낄대다가 노트북을 보던 시선을 나에게로 옮긴 그를 의식했다.

잠깐 보고 마는 그의 표정에서 슬픈 미소가 느껴졌다. 다 쓴 거 같은데 피곤해서 그런 거 같다. 음.. 아닌가? 학생 때가 그리운 건가? 

아니 그나저나 지금 새벽이야 저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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