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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온 May 01. 2024

머그컵

#3/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당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담을 준비가 되어있어. 내 본래의 목적이 아니어도 말이야."





 어느 날 내가 사는 이곳에서 나와 같은 컵들은

각자의 주인이 정해졌다. 얼핏 기억하기로는 코로나가 극심해졌을 시기였나? 이 집의 첫째 아들이 코로나에 걸렸을 때 나는 첫째 아들의 선택으로 계속해서 그의 입에 닿고 있다. 

물론, 나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 세제, 수세미와 함께 목욕하고 나면 늘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깨끗하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2020년 한국에 본격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 나갈 때부터 줄곧 첫째 아들과 함께 했는데 작년인 2023년에 뉴스에서 코로나와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료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집에서는 컵의 주인이 정해졌을 뿐 자주 마시거나 안 마시거나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였다. 첫째 아들은 한때 물을 많이 마시다가 요즘엔 회사에서 500ml 생수를 자주 갖고 온다. 환경문제에 관심이 없는지 요새 트렌드를 못 쫓아가는 건지 누가 한 번 옆구리를 강하게 찔러줘야 정신 차릴 테다. 

 여전히 나는 그의 손에 자주 들리긴 하지만 간혹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내 옆에 있는 다른 컵에 손을 뻗는 첫째 아들놈이 괘씸해 보일 때가 있었다. 코로나도 끝났다고 신경을 아예 쓰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일은 가끔이니까 이제는 가볍게 넘어가려고 한다. 잡은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나는 깨지지 않을 테니까. 다른 컵들보다 나는 단단한 컵이니까. 나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며 그깟 질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넘기려 한다. 

 내 이런 성격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 몸에는 대한민국 공군의 상징이자 자랑인 블랙이글스 그림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군인정신이 깃들어져 있는 몸이다. 다른 컵들을 질투하지 않고 내 자리에서 꾸준히 쓰임 받는 그런 컵으로써 멋있게 살아가길 원한다. 


 나는 물만 담지 않는다. 음료수도 담고 와인도 담기기도 한다. 비록 투명한 유리컵이 아니어서 내 안에 담길 무언가의 색을 드러낸다던가 조명을 받아 빛을 머금어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지만 그런 투박한 내 모습이 좋다. 나를 선택한 그가 투박한 내 삶처럼 거친 매력이 있는 남자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주인이었으면 좋겠다.

남자다운 모습이 자주 보이지 않아서 걱정되던 그가 요즘 집에서 홈트를 자주 하는데 소리 없이 응원 중이다. 

예전에는 크로스핏도 했는데 그때 배운 운동을 집에서도 몇 개 하곤 한다. 그래서 힘든 운동을 할 땐 나에게 찬물을 잔뜩 담아서 식탁 위에 올려둔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무조건 땀 흘리는 운동을 할 때면 물을 마셔야 하니 항상 대기하고 있는다.

 내가 사람이었으면 옆에서 같이 운동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는 운동하면서 유튜브로 운동 자극 영상을 보거나 넷플릭스에서 했던 피지컬 100 시즌 2를 보기도 하는데 몸 좋은 사람들의 테스토스테론과 아드레날린이 화면을 뚫고 나오니 덩달아 신나서 운동할 때도 있다. 내가 사람이었으면 매일 그렇게 신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든다. 

옆에 있던 컵이 입만 살았다고 하는데 하... 이걸 보여줄 수도 없으니 참 답답하다.

말하다 보니 열받아서 안 되겠다. 내 밑으로 다 집합! 




 그는 가끔 국화차를 우려 마시거나 깔라만시 차를 우려 마시기도 한다. 아무래도 커피보다는 차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다. 차를 담아서 노트북이 있는 책상 앞으로 간다. 그가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시간이 많은데 매일까지는 아니지만 나를 데리고 들어와서 하루종일 앉아 있는다. 다 마셨으면 싱크대로 데려다줬으면 좋겠다. 빨리 목욕하고 싶은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건지 어쩔 때는 다음 날 방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특히 집 밖에 안 나가는 쉬는 날에 그렇다. 

 저번에는 나한테 딱딱한 게 우수수 떨어져서 보니까 아몬드였다. 입에 털어 넣기 딱 좋게 담아서 방으로 데려갔다. 날 선택한 이 집 첫째 아들이 컵 활용은 제일 잘하는 것 같다. 아직까지 시도된 적은 없지만 곧 다른 것도 담길 것 같다. 여기 사람들은 떡볶이를 자주 만들어 먹는다. 보통 떡볶이는 그릇에 많이 담지만 그날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완성된 떡볶이와 나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봤다. 나를 헤치려는 건 아닌데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다. 


'설마 떡볶이도 나에게 담을 생각인 건가?'


 결국 그의 선택은 그릇에 담아서 거실 식탁에서 먹었지만 얼마 못 가 현실이 될 이야기로 보인다. 원래 담는 용도로 태어나긴 했지만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일이 나에게 벌어지고 있어서 당황하긴 했다. 그래도 티는 안 냈다. 나는 군인정신이 깃든 컵이다. 무엇이든 들어와라 다 받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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