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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온 Jun 18. 2024

립밤

#16/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작년 겨울, 그는 입술이 메마른 황무지가 되다 못해 갈라져 피가 자주 났다. 참 고생 많이 했다. 아니 사실 그는 겨울이 아니라 가을부터 고생 많이 했다. 내가 그의 손에 들려진 건 가을이 유독 쓸쓸할 때였으니까.




 매년 가을부터 입술과 그 주변이 트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23년의 그는 유독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는지 나를 자주 찾았다. 내가 만병통치약은 아닌데 괜히 입술이라도 나으면 다른 곳도 나을 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좀 더 빨리 아물기를 바라는 그의 입술을 위해 나는 여러 모습으로 함께 있었다. 발색 기능이 있을 때는 그의 입술을 온전히 보습해 주지 못해 금방 버려지고 또 다른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 촉촉하게 만들었다. 예민했던 그의 입술이 나로 인해 다시 건강해졌다. 물론 꽤나 오래 걸렸지만 나는 아직까지 잘 쓰이고 있다. 한 여름에도 쓰일 예정이다. 


 지금은 두 가지 모습으로 존재한다. 건강해서 그런지 발색이 있는 립밤으로서 살기도 하고 건조하다 싶으면 보습으로 충만한 립밤으로서 살기도 한다. 

나는 여러 사람들과 여러 모습으로 함께 한다. 물론 내 주인은 한 명이다. 여러 사람들의 가방과 주머니에 들어있으며 사계절 내내 함께한다. 나는 봄에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들처럼 아름다운 입술을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여름철 새벽이슬 같은 촉촉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립밤으로 살면서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준다. 어떤 이는 내가 향이 좋다고 하고 음식이 아니지만 내가 맛있다고도 한다. 어떤 이는 나를 키스를 부르는 존재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연애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올 해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불러올지 기대가 된다. 이제 3월이 지나 곧 꽃 피는 4월이다. 따뜻함을 품은 봄에 올 새로운 이야기가 기대된다. 내 주인은 좋은 소식 없으려나. 늘 기대 속에 살아가지만 기대와는 달리

시간만 쏜살 같이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3개월이 지났다.


 이 글은 3월 19일에 쓰였었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 6월에 다시 쓰이고 있다. 그때는 그가 브런치 작가가 되기 전이었고 그간 힘들었던 일들을 글로 풀어낸 지 얼마 안 됐던 시기다. 작년 9월이 그의 마지막 연애였다.

연애가 늘 쉽지 않지만 이제는 연애 DNA가 다 죽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뻣뻣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글을 쓰면서 그나마 약간의 유연함은 유지하고 있다. 핑크빛이 돌아야 할 그의 연애세포들이 점차 회색으로 변해가더니 돌처럼 굳어 가고 있다. 

여전히 특유의 능청스러움은 존재하지만 눈앞에 여자 한 명만 있으면 좀처럼 그 능청스러움은 힘을 쓰지 못한다.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일까? 스스로 재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내가 보고 들은 그의 마지막 연애를 

말하기 위해서는 처음 그의 갈라져 피가 나오던 입술을 설명할 때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친구의 소개로 한 여름밤의 꿈을 꾸게 된 그는 설렘으로 가득한 카톡을 그녀와 주고받았다. 안구 건조증이 있었지만 그녀와 만나는 날에는 유독 물을 많이 마셨다. 그렇게 하면 안구 건조증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고.

연락을 하다가 첫 만남에 충분히 대화가 잘된다는 사실에 그는 기뻤다. 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미인은 아니지만 귀여운 외모와 수수한 모습이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작지 않은 키 또한 그녀를 더욱 빛내 주었다. 

때문에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또 한 번 보자는 그의 제안에 흔쾌히 승낙했다. 두 번째 만남 땐 마침 둘 다 차가 있어서 경기도 인근, 주꾸미 집에 갔다. 

그녀는 경기도에 있는 회사, 그는 인천에 있는 회사를 다니지만 서로 퇴근 시간이 다르기도 하고 오래 하지 않았지만 야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평소보다 저녁 시간을 뒤로 미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만남의 설렘과 즐거움이 배고픔을 달래줬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여전한 미소를 보였다. 음식이 나왔을 땐 서로 먼저 퍼가라며 손사래를 치다가 그가 마지못해 

음식을 정갈하게 담아 그녀 앞에 뒀다. 그녀가 고맙다며 내가 음식을 담아 그의 앞에 놓기 전까지 기다려줬다. 그녀는 이 주변에도 맛집이 꽤나 있다고 했다. 그도 그 말에 대해 충분히 공감했다. 

그의 친구들이 이미 스무 살이 조금 지난 시점부터 차가 있었기 때문에 경기도 까지는 자주 돌아다니곤 했는데 맛집도 자주 가다 보니 경기도 일대에 숨겨진 맛집이 꽤나 있음을 알게 됐다. 밥을 다 먹고 호수가 보이는

카페에 갔다. 평일 저녁이었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잔잔한 음악은 흘러나오고 호수 위로 운치 있는 안개가 호수 위를 걸어 다녔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따뜻한 조명색, 그리고 귀여운 고양이가 통창 밖에서 그들의 설렘을 연애프로그램의 패널들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해도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렸고 너무 대화 소리가 그 공간을 울리니 기분 좋은 불편함이랄까? 어색한 공기가 그곳에 흘렀지만 그는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날 그가 집에 돌아가면서 소개를 주선해

줬던 친구에게 전화를 해 겪은 설렘들을 전하려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음 날 출근길에 주선자에게 전화가 왔다.


"상세히 보고해봐"

"좋지 뭘 물어~"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세 번째 만남 이후로는 그의 용기 있는 고백에 쭈뼛쭈뼛 받아줬다. 둘 다 연애를 많이 해보지 못해서 서툰 모습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곧 잘 여름과 같은 푸릇푸릇한 사랑을 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계절을 탔는지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지날 무렵 색이 바래 낙엽이 되어 가는 중에 생기를 잃었다. 길게 사귄 건 아니었고 그 이전에도 몇 번 있던 일이지만 이상하게 쉽사리 회복되지 못한 마음은

그대로 입술로 나타났다. 그의 갈라진 입술은 계절이 두 번 바뀔 때까지 낫지 않았다. 


 그는 그의 연애 일화처럼 몇 줄 안 되는 짧은 사랑을 기록했다. 그래서 한동안 굳게 닫고 본업과 부업에 몰두하던 때가 있었다. 몰입의 시간이 있었기에 많이 회복된 듯하다.

이제는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고 새롭게 연애에 도전 중이다.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의 립밤처럼, 마치 지금의 나처럼 복숭아향이 나고 분홍빛을 띠는 연애를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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