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 짧은 글 에세이_사물의 입장에서 글쓰기
너네는 '안경'하면 무슨 생각이 들어? 내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패션이나 공부 잘할 것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더라고. 나를 선택한 이 사람은 두 개 중에는 '패션'쪽에 가까운 것 같아.
그래도 이 사람은 글을 좋아하나 봐. 피곤해도 짧게라도 책을 읽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해 보이더라. 책을 읽기만 하지 않고 글을 쓰기도 하는데 쓴 글들로 책을 만들 건가 봐. 전보다 훨씬 더 나를 찾고 있어.
덕분에 나도 좋은 책들을 많이 보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안경잡이라고 놀림받는 친구들이 대부분 똑똑했다고 들었거든. 그래서 마치 내가 그때 그 시절 똑똑한 안경잡이가 된 느낌이야.
이 집에서는 아마 내가 제일 아는 게 많은 똑똑한 사물이지 않을까 싶어. 좀 오만해 보였다면 사과할게 굳이 욕먹어가며 똑똑한 사물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
내가 며칠 전에 그와 함께 거울 앞에 선 적이 있는데 내 투명한 유리알이 살짝 노란빛을 띠더라. 아무래도 노트북에서 나오는 블루라이트를 차단할 목적으로 쓰고 있는 것 같은데(이것도 책에서 봤어) 그런 거라면 날 정말 잘 사용하고 있는 거야. 시력 보호는 모든 생명체에게 정말 중요한 거니까. 사람에게 다섯 가지 복이 있다는데 그중 하나가 시력이래. 시력이 좋은 건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정말 좋은 스펙이잖아. 이 사람은 나를 잘 보이기 위한 수단보다는 보호막으로 사용하고 있어. 지금 시력이 좋은 것 같아. 저번에 듣기로는 왼쪽 1.2에 오른쪽 1.5라고 했나? 아직 올해 시력은 재보지 않았지만 아마 크게 바뀌진 않은 것 같아. 바뀐 게 있다면 나를 쓰고 있는 그의 이미지가 바뀌었어.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그의 내면까지도 말이야.
이건 내 생각도 있지만 그와 같은 사람들의 말인데 어느 날 그가 늘 다니던 교회를 갔을 때 교회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대 "안경 쓰니까 사람이 좀 달라 보인다." 공감이 되는 게 날 사용하는 이 사람은 지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싶을 때 날 사용한다던가, 부은 얼굴을 가리고 싶을 때 날 사용하더라고.
그런데 좀 달라 보인다는 말이 꼭 좋은 뜻만은 아니었던 거지.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어. 나는 요즘 유행하는 투명한 테를 가졌고 금색의 포인트들을 갖고 있는 나름 세련된 안경이라고 생각했는데 날 쓰고 간 날, 그가 들은 말은 '윌리를 찾아서'의 윌리 같다는 거야.(※ 검색해 보면 월리, 윌리 둘 다 같은 것으로 나온다.) 내가 놀림당한 것처럼 기분이 약간 묘했는데 이 사람은 웃더라.
안경을 쓰지 않던 사람이라 그런가 나를 쓴 본인도, 안경 쓴 이 사람을 본 사람들도 어색해했어. 그래서 집에서만 쓰는데 자꾸 쓰다 보니까 금방 익숙해지는 거 있지? 나도 처음에 그들이 어색하는 걸 느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나를 쓰고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그를 보고 많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
예전에 나 말고 안경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친구는 그의 회사 서랍 제일 아래 칸 중에서도
안쪽에 뿌리가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대. 그 소식을 들으니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 했었는데 그 친구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참 다행이야. 사람 인생만 쉽지 않은 게 아니더라.
품생(品生)도 결코 쉽지 않아.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계속해서 어필을 해야만 해. 마치 사람들이 끊임없이 삶에서의 안정욕구 느끼고 싶어 하는 것과 취업시장이나 어떤 집단 내에서의 소속욕구를 느끼듯이 말이야.
자주 쓰다 보니 주변 사람들도 나를 쓴 그를 어색해하지 않아 하더라. 이제야 비로소 한 몸이 된 거지. 언젠가 그의 시력이 떨어지면 나에게서 렌즈만 바꿔 끼우면 되니까 크게 불안함은 느끼지 않아.
그가 달력을 볼 때 나도 같이 본 적이 있는데 어느새 그와 함께한 지 3개월이 지났더라. 안경 쓴 사람들이 가끔 무슨 일을 하다가 피곤하면 눈물샘이 있는 눈 앞쪽을 문질러주곤 하는데 최근 며칠 사이 그가 나를 눈 위로 올리더니 눈 앞쪽을 문질러주고 있었어. 그도 점점 나를 쓰는 게 피곤해진 건지 자주 그러더라고. 나를 보던 눈빛도 예전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여전히 나를 찾아주고 있음에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요즘이야. 그래서 든 생각인데 들어보고 어떤지 판단해 봐.
내가 그와 붙어 있을 때 그에게 계속해서 텔레파시를 보내던 뇌파를 보내던 어떤 식으로든 교감을 해서 밤에 불 꺼놓고 침대에 누워서 지금처럼 폰을 보라고 하려고. 그래야 나를 좀 더 오래 쓰지 않겠어? 아... 이건 너무 나쁜 마음인가? 어차피 아예 깜깜한 환경도 아니고 매번 침대 머리맡에 전등이 있어서 전등을 켜고 폰을 보다가 잘 때 다 끄고 자는 게 그의 루틴이야. 지금처럼만 하라는 거지. 더 많이도 말고 딱 지금처럼 적당히 말이야. 그의 시력이 너무 나빠지면 나도 마음이 아파. 진짜 진심이야. 나를 너무 나쁘게만 몰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좋아하는 사람 옆에 붙어 있고 싶으면 이 정도 욕심, 질투는 할 수 있잖아?!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아. 나도 그 아름다움을 내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보고 싶어. 좋은 글, 좋은 영상, 좋은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웃고 있는 그 자리에 있고 싶어.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 결코 외로운 삶을 살지 않는 건 어느 누구나 다 원하는 삶이지 않을까?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그렇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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